수학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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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아름답다?
  • 이천저널
  • 승인 2007.06.0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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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서의 발목 잡는 공부에 날개 달기

유럽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은 원근법입니다. 이 시기 이후 한국 등 동양의 회화와 서양 회화의 차이를 말할 때 늘 원근법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원근법이란 무엇일까요? 멀리 있는 것은 작게, 가깝게 있는 것은 크게, 보이는 대로 사물을 그리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원근을 구분하는 것은 사람의 생물학적 ‘눈’이 가진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기능인데, 어떻게 원근법이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이 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르네상스의 그림과 서양의 다른 시대나 다른 문명권의 그림을 비교해 보여주면서, ‘보시오, 어떤 것이 더 진짜 같소?’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르네상스 회화의 우수성을 은근히 ‘강요당해’ 왔습니다.

르네상스 이전 시대 서양 중세의 그림들은 대부분이 교회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이 교회의 시녀였던 시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서양 중세(비잔틴 등)의 그림들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그림 속에 분명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예수와 동방박사, 천사를 만나는 마리아 등등. 이런 그림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앞을 보고 있거나 옆으로 죽 늘어서 있고 머리 위(하늘)나 바닥(땅)도 구분이 모호합니다. 그림의 배경은 아예 없거나 무시되어 있습니다. 인물의 배치나 크기는 당연히 배역의 중요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오직 신과 성인(聖人)들과 그 사이의 스토리(성경)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에서 전체적으로 풍기는 신비로움과 경건함은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아름답습니다.

>> 르네상스 이후 등장한 ‘새로운 아름다움’ 기하학

당시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나 그림을 보는 사람이나 모두 성경이라는 유일한 스토리가 가진 아름다움을 충분히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화가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스토리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썼던 것입니다.

하지만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이 중심 스토리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고대의 비극들과 모험담이 되살아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지난 시기 아랍에서 보관하고 있던 고대 그리스의 학문이 다시 유럽으로 유입되었습니다. 이제 화가들도 과거 스토리의 아름다움에서 해방되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자신의 재능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그들이 발견한 ‘새로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하학이었습니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문예부흥)는 항해 중인 배가 등대를 바꾸는 일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중세 기독교의 빛을 뒤로 하고 고대 그리스의 빛을 따라 가기로 뱃머리를 바꾼 것입니다. 당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거의 만능이었습니다. 건축을 설계하고 다리를 놓고 운하를 만들고 성을 쌓고 심지어 전쟁 무기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오히려 여가 생활에 가까웠습니다. 고대의 수학과 과학의 정신이 다시 부활하던 이때의 공학자들(동시에 화가들)은 당연히 기하학을 비롯한 잊혔던 고대 그리스의 방법들에 심취하게 되었고 재빠르게 현실에 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기하학은 공학적인 실용성도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 앞서 기하학은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섬세하게 선택된 명제(공리), 정교한 논리로 유도되는 정리, 스스로의 논리를 반성하는 증명, 평면과 입체에 대한 명료한 표현…. 문명을 일구는 천재적인 인물들에게  상상과 창조의 작업을 하게 만드는 그런 ‘아름다움’을 기하학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기하학의 아름다움을 그림 속에서 표현해 내려고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3차원을 평면에 옮기는 일이고, 기하학은 회화의 이런 목적에 아주 적합하게 보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이제 더 이상 그림 속의 인물들은 심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정교하게 계산된 우아한 기하학적 건물이나 자연을 배경으로 갖게 되었고 인물들도 배역의 중요도가 아닌 기하학적 아름다움에 적합한 위치에서 표현되기 시작했습니다.

>> 원근법을 완성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15세기가 되면서 화가들은 원근법이 과학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열쇠는 기하학이라고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물을 ‘아름답게’ 그리는 화가 본래의 책무(?)보다 새로운 그림그리기의 접근법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해졌습니다. 심지어 그림그리기와 기하학을 동일시하기도 했다. 이것은 공간의 구조를 이해하고 자연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수학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고 궁극의 진리를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여긴 르네상스의 철학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원근법을 기하학적으로 완성하는 이런 작업의 정점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체력으로 해부학, 기하학, 원근법, 물리학, 화학, 공학, 예술의 영역을 연구했습니다. 다빈치는, 회화는 자연을 재생하는 것이고, 그 재생의 가치는 정확성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수학적 확실성과 그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실천을 통해 예술을 표현하려는 행위를 경멸했다고 합니다. 다빈치는 자신의 책 <회화론> 서두에, 플라톤이 자신의 학교 입구에 써 붙여 놓았다는 말을 연상케 하는 글을 적었습니다. ‘수학을 모르는 사람은 이 책을 읽지 마시오.’

투시와 소실점으로 대표되는 원근법은 간단히 말하면, 유리창을 통해 바라본 바깥의 풍경을 유리창 위에 정확히 그리는 작업이라고 보면 됩니다. 풍경을 유리창으로 옮기는 것을 사영(寫影)이라 하고 유리창을 절단면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 화가들에 의해 연구된 원근법은 사영 기하학이라는 새로운 기하학의 분야를 만들어내는 기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회화가 발견한 새로운 아름다움의 영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18세기가 되면서 서양 예술은 다시 ‘편견 없이’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영혼의 화가라고 불리는 고흐의 그림을 보면 정교하게 원근법을 사용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무시하여 자신의 느낌을 강조합니다. 고흐의 그림에는 태양보다 더 크고 밝은,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달과 별들이 등장합니다. 고흐는 사람들의 꿈속에서 달을 퍼 다가 원근이 분명한 ‘심심한’ 세상 위에 보란 듯이 띄워 놓은 것입니다. 고흐만의 아름다움입니다.

한편 19세기 한국의 화가,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를 보면 원근도 없고 달도 없고 별도 없습니다. 이상하게 생긴 소나무 몇 그루와 찌그러진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있을 뿐입니다. 르네상스 회화를 기준으로 보면, 세한도 속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무엇’이 있음을 모두가 느낄 수 있습니다.

수학적 사고와 표현방법이 서양의 근세에 미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과학과 공학은 물론 철학, 문학, 음악, 미술에 이르기까지 수학적 아름다움만이 한 세기 이상을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아름다움은 미의 역사의 한 부분을 장식했던 과거가 되었고 아름다움을 쫓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모두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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