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5주년 특집 일본내각이 역사적 진실을 철저히 은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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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특집 일본내각이 역사적 진실을 철저히 은폐
  • 박인식 일본학술박사
  • 승인 2020.08.14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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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반일 감정은 명성황후 살해가 원류

 편집자 주: 명성황후 살해사건은 지금까지의 견해와는 달리 일본내각이 가담하여 계획되고 실행되었다는 박인식 박사의 연구결과를 광복절 특집기사로 게재한다. 박인식 박사는 오랫동안 일본에서 수집해 온 역사자료인 일본 외무성 문서와 조선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호:観樹)의 수기 등을 통해서 당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이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 했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명성황후 살해의 주요 주범들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1846~1926) 당시 조선공사//왕비 살해를 진두지휘
야마구치(山口)현 출생. 메이린칸(明倫館)에서 수학을 하고 세이난 전쟁(西南戦争 1877)에서 공을 세웠다. 1878년에 육군중장으로 승진하였고, 1895년 9월 1일 주한조선국특명전권공사에 취임하였다. 삼국간섭 이후에 조선정부에 대한 일본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한성신보사장 아다치의 협조를 얻어 반일성향의 명성황후를 살해에 직접 지휘하였다. 그 죄로 히로시마(広島)에서 투옥되었으며 12월 12일 히로시마 지방법원에서 예심 시작되었다. 다음 해인 1896년 1월 20일 히로시마 지방법원 예심과 군법회의 결과 히로시마 지방법원은 증거가 충분치 않다며 미우라 이하 48명의 피고인 전원을 면소하고 미우라를 방면했다. 1926년 요독증(신부전증)로 사망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5~1915) 전임 공사//처음부터 살해 계획 및 사후처리
야마구치(山口)현 출생으로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조선공사와 메린칸(明倫館) 동문이다. 일본 메이지 유신의 활동가로 근대 일본의 교육자, 정치가, 외교관, 사상가, 기업인이다. 1876년 2월 27일, 구로다 기요타카 (黒田清隆)특사와 함께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즉,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였다. 1881년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와 함께 조선에서 신문물 견학차 파견된 신사유람단 단원들의 편의를 봐주었다. 조선에서 신문물 견학차 사절단이 파견되기 이전에 이동인, 어윤중, 박규수, 유대치 등과 사전에 교류하기도 했다. 제1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부 제5차관되었다.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내무대신을 지냈고, 제4차 이토 내각의 붕괴 이후, 내각총리대신에 낙점되었으나, 정국의 운영이 쉽지 않겠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사퇴하고 가쓰라 다로(桂太郎)에게 양보하였다. 이토가 사망한 이후,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와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와 함께 겐로(元老)로서 정관계와 재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15년 지금의 시즈오카(静岡)시에서 뇌출혈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1841~1909) 당시 총리//미우라를 조선공사로 임명
야마구치(山口)현 출생. 쇼우카손죽쿠(松下村塾)에서 수학. 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초대, 제5대, 제7대, 제10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추밀원(枢密院)의장, 초대 귀족원(貴族院)의장, 입헌정우회(立憲政友会) 총재 역임. 1905年 초대 조선통감. 1909년 하얼빈((哈爾濱)에서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사망하였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 1838~1922)//조선공사로 가도록 미우라를 설득
야마구치(山口)현 출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쇼우카손죽쿠(松下村塾)에서 학습. 1889년에 야마구치(山口)현 육군 군인으로서 처음 내각 총리대신으로 취임. 1894년 청일전쟁에서는 56세에도 불구하고 제1군사령관으로서 스스로 전지에서 작전을 지휘. 1898년에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 발족. 원로(元老), 육군대장, 원사(元帥).
 

아다치 겐조(安達謙蔵) 일본인 경영신문 『한성신보』 사장(1864~1948)//한성신보사 기자들 현장 살해가담

구마모토(熊本)현 출신으로 신문기자와 내무대신, 체신대신, 중의원(衆議院) 의원으로 활동했다. 왕비 살해자로 지목되어 구속된 48명 중, 한 사람이다. 을미사변 범죄 행위에 가담한 사람 중에는 구마모토(熊本)현 사람 21명이나 된다. 이중 히로다(広田正善), 나카무라(中村楯雄), 다나카(田中賢道)의 민권운동 3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위의 아다치 겐조 포함 대부분 기자출신의 구마모토 국권당 관계자였다. (일본 외무성 문서 『왕성사건관계1건』 「예심종결결정서」 참조). 이 후, 구마모토로 돌아와 사사 토모후사(佐々友房)와 함께 구마모토 국권당을 결성하여 1896년 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1902년 제7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당선되어 정치계에 진출해 14회 연속 당선되었다. 1932년에는 나카노 마사요시(中野) 등과 전국동맹을 결성했다. 그 후, 그는 1935 년에 내각심의위원회의 일원이 되었고 1940 년에제1차 고노에(近衛) 내각에서 내각 참의로 임명되었다. 그런 후, 1942년 정계에서 물러났다. 일본 패전 후 공직에서 추방되어 83세의 나이로 1948년 8월 2일에 사망했다.

일본내각의 주도로 명성황후 살해 과정

  •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후임으로 육군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三浦梧)를 조선 공사 추천하지만 미우라는 공사직을 두차례 거부한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군부 최고실권자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에게 설득을 부탁해 결국 미우라는 공사직에 승락한다. 곧바로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공사로 승인하지만 미우라에게 아무런 훈령도 전달하지않는다. 내각으로부터 훈령도 없이 미우라 공사는 조선착임한 후에는 전임 이노우에로부터 모종의 계획을 받는다. 미우라는 이노우에가 일본으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공사의 지시 하에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기습하여, 조선의 왕비(1897.10.12. 명성황후책봉·추존)를 참혹히 살해하였다.

명성황후의 살해를 지휘한 미우라 공사는 부임한지 얼마 안된 예비역 육군중장 출신이었다. 현장에서의 무력행사는 일본군 수비대이고, 행동대는 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 장자 등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역사학자들조차 사건배후에는 일본 내각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한일 근현대 정치언론을 연구해 온 KCJ국제관계연구소의 박인식 박사는 명성황후 살해의 주범은 당시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 중심으로 하는 야마구치현을 고향을 둔 정치가와 관료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일본 외무성 자료와 미우라 공사의 수기를 통해서 밝혀냈다.

미우라 고로는 살해의 주범이기도 하지만, 총리 이토 히로부미, 군 최고실권자이자 원로인 야마카타 아리토모(山県有朋), 전임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 모두 같은 고향 선후배의 계략과 음모로 꼭두각시처럼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미우라 수기 등에서 찾아 냈다고 박인식 박사는 설명하고 있다.

미우라 고로의 호인 ‘관수’ 호칭을 딴 자서전 <관수장군회고록>(観樹将軍回顧録, 政教社, 1925년)를 보면, “이노우에 가오루가 공사로서 조선정부의 정무개선을 계획하기 위해 일본에서 많은 고문관을 데리고 오지만,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는 않고 일본에 대립을 보이는 왕비와 왕실 태도에 이노우에는 크게 자극을 받고 격노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미우라는 명성황후에 대해서 이노우에 공사가 다음과 같은 묘사하고 있다. “왕비가 정치에 참견하는 것은 좋지 않다. 대원군이 정치에 말 참견하는 것도 좋지 않다. 이들 두 사람 다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중략)그러나 왕비는 아무리 해도 틀어 박혀 있지 않고, 왕비는 여성으로서 실로 진귀한 재주가 있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중략)국왕에게 어떤 날카로움을 지시를 하므로, 사실상 조선국왕은 이 왕비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라고 명성황후의 정치적 견해의 예리함과 총명성을 극찬하면서 분노에 차 있었다고 한다.

이노우에는 조선개혁의 반대와 반일 자세를 취하는 왕비에 대하여 정치간섭을 엄격하게 금하는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능숙한 정치적 소양을 겸비하고 총명한 머리를 가진 왕비는 일본의 의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이노우에의 강력한 걸림돌이 되었다. 명성황후는 이노우에의 여러 협박에도 기죽지 않고 정치적 소신과 반일 의견을 강력히 폈다고 박 박사는 덧붙였다.

청일전쟁 후, 삼국간섭에 의해 일본은 국제적으로 국가 위신이 실추되었고 조선에서의 이노우에 가오루 개혁도 후퇴하게 되었다. 이노우에는 왕비의 존재에 대해서 강한 불만을 품고, 자신의 입장을 대신할 같은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이며, 하기(萩)의 메이린칸(明倫館) 동문이기도 한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 고로를 조선공사로 적극 추천한다.

이노우에가 강력하게 공사로 추천한 미우라는 “외교에 대해서 조금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은 가고 싶지 않다고 거듭 거절하자 이노우에는 동향이고 군부의 최고 권력자인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에게 부탁을 통해 미우라가 어쩔 수없이 조선에 가도록 계략을 꾸민 것이다.

미우라는 외교 수완이 없는 군인출신으로서 국가주의자이기도 했다. 국가가 원한다면 과격한 무력도 불사하는 인물, 동향동문으로서 누구보다도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이노우에는 미우라 공사 추천은 제국일본의 대륙침략과 지배의 장애물인 조선의 왕비를 제거하라는 암시였다. 더군다나 미우라를 공사 임명한 후에도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정부의 어떠한 훈령도 전달하지 않고 급히 조선공사로 보낸 것도 그런 이유였다.

히로시마 지방법원의 예심과 군법회의 결과
미우라를 포함 전원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하고 석방


미우라 수기인 『관수장군종횡담(觀樹將軍縦横談)』과 『관수장군회고록』에 의하면, 10월17일에 왕비 살해의 주범인 미우라 공사는 해임·소환되어 다음날 18일에 미우라, 아다치 겐조(安達謙蔵: 한성신보 사장)를 포함한 약50명의 재류 일본인의 퇴거 명령이 내려졌다. 미우라를 포함하는 관련자들 48명은 히로시마 지방법원에 기소되었다.

1896년1월 20일, 미우라는 히로시마에서 수감되어서 재판을 받았지만, 군법회의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또한 히로시마 지방재판의 예심에서도 요시오카(吉岡美秀) 판사는 전원 면소로 석방시켰다. 출옥하는 날 미우라는 “그 주변의 유지들의 환영회에 초청되었다. 그곳부터 기차로 돌아갔지만 연도에 이르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군집해서 만세! 만세!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일이 있었다”라고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정부는 국제 범죄자들을 적극 보호하고, 감옥에서도 뿐만 아니라 관민으로부터도 영웅처럼 대우를 받았다. 미우라가 석방되어 도쿄에 도착했을 때 일왕은 사람을 보내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고 미우라는 그의 수기에서 밝히고 있다.

일본정부는 을미사건 직후, 미우라 외 현장 살해범들을 서둘러 일본으로 소환하고 형식적인 재판을 통하여 사건을 조속히 마무리 졌다. 이것은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한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의 최고 군부 권력자와 내각 수권자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하에서 이뤄졌다. 이 때문에 일본정부는 왕비 살해 사건이 국제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전대미문의 사건을 단 기간 가볍게 처리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박인식 박사는 설명하고 있다.

조선에서 일본세력을 배제하려는 왕비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전임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치밀한 계획과 주도하에 신임 미우라 고로 공사와 스기무라(杉村濬) 서기관은 일본내각과 군부 최고 권력자의 후원을 받고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의 시해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 난무하는 것도 당시 일본정부가 국제적 책임과 고립을 피하기 위해 진실을 철저히 감췄기 때문이다. 일본의 은폐공작은 사건 자체를 혼란에 빠트리고 미스터리화 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역사적 진실이 봉인되어 왔던 것이다.

육군 중장의 무관인 미우라를 왜 공사로 임명했나?

일본정부는 청국과 조선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일본이 조선반도의 지배권을 얻으려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은 대사파견을 통해서 정체되었던 조일 국교조정을 서둘렀고 청국을 대신해 우위에 선 조선관계를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은 줄곧 조선의 내정개혁을 진전시키기 위해서 수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조선공사를 소환하고 내상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한다.

이노우에는 그동안 을미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지만 러시아는 청일강화조약으로 랴오둥 반도의 할양을 요구한 일본에 대하여 독일·프랑스와 합세해 일본의 할양 요구를 폐기하도록 권고하는 삼국간섭을 일으켰다. 일본정부는 이런 상황에 적절한 타개책을 찾지 못한 채 조선에 대해 간섭정책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빠진 일본정부는 이 과정에서 이노우에 공사를 미우라 공사로 교체하였다. 조선정부는 이노우에 공사의 귀국이 일본이 조선에서 퇴각한다고 생각한 조선정부는 러시아에 접근해서 내각의 친일파를 추방시키고 친일세력이 무기력하게 될 때 「훈련대」를 해산시켜서 「내정개혁」을 청산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되면, 조선에서 일본 세력기반은 완전히 붕괴되므로 신임 미우라 공사는 이노우에 의도에 따라 스기무라 후카시 서기관, 군부겸 궁내부 고문관의 오카모토 류스케(岡本柳之助), 아다치 겐조들과 왕비 살해를 공모하게 된다.

살해사건이 있어던 당일, 외무성 차관인 하라 다카시(原敬)는 사건에 관한 전보내용을 10월 8일자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경성에 있어서 군련대(훈련대)와 대원군을 옹립해서 왕궁에 들어가 시위병과 조금 싸움에 빠지나 우리 수비대의 보호로 일이 없음, 미우라 공사 국왕의 초대로 아침 6시 참내하고 왕비는 행방불명, 일설에는 살해되었다는 전보”라고 적고 있다. 미우라가 일본 외무성에 허위보고를 했음 말해주는 대목이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괘』(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

『명성황후국장도감의괘』는 1895년 10월 7일 새벽에 일어난 을미사변으로 살해당한 명성황후의 장례를 치르는 국장(國葬)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본 의궤는 1897년 10월 28일부터 수정을 시작하여 1898년 5월 20일에 편찬을 완료하였는데, 당시 총 7권을 제작하여 규장각ㆍ시강원ㆍ의정부ㆍ비서원ㆍ장례원ㆍ강화부ㆍ강릉 오대산에 보관하였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괘』는 총 4책으로 되어 있는데 제1책: 시일(時日), 좌목(座目), 조칙(詔勅), 장계(狀啓), 조회(照會) 내조(來照), 장례원통첩(掌禮院通牒), 훈령(訓令), 보고(報告), 감결(甘結), 상전(賞典) 제2책: 일방(一房), 이방(二房) 제3책: 삼방(三房), 부전(附箋) 제4책: 우주소(虞主所), 지석소(誌石所), 별공작(別工作), 포진소(鋪陳所), 배설소(排設所)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5년 5월, 박인식 박사가 일본 황실 궁내청에 문서 열람 신청을 하여 1개월 후, 열람허가를 받고 들어가 직접 찍은 사진. 이 의괘는 오대산본으로 1922년에 조선총독부가 황실에 기증한 후, 궁내청 서릉부에 보관되어 있다.

명성황후의 살해를 주도한 미우라 공사의 행적을 말해주는 『観樹将軍豪快録』(1918), 『観樹将軍英雄論』(1920), 『観樹将軍縦横談』(1924), 『観樹将軍回顧録』 (1925) 과 메이지 사료연구 연락회 소속 야마모토 시로(山本四郎)가 야마구치(山口)현 하기(萩)시에 있는 미우라고로의 자택에서 비밀리 보관 중인 외교문서를 필사를 통해 127(122)쪽으로 엮은 미우라고로 관계문서(三浦梧楼 関係文書, 1960년) 등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현재 야마구치(山口) 현 하기(萩)시립도서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일본 외무성 기밀비로 한성신보 발행
엘리트 기자들의 살해 가담

명성황후 살해를 현장에서 지휘한 사람 중, 1892년 10월에 부산에 온 구마모토 국권당의 아다치 겐죠(安達謙蔵: 1864~1948)다. 아다치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공사로서 착임했을 때, 이노우에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조선인을 계몽하기 위해서 조선언문에 의한 신문을 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노우에 공사는 그의 말에 공감하고, 일등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에게 신문발행에 대해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1894년12월1일, 이노우에 공사는 전문으로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 외무대신에게 조선에 있어서의 신문발행 비용을 요청으로, 1895년 2월 17일, 아다치 겐조(安達謙蔵)와 사사 마사유키(佐々正之)가 외무성 ‘기밀비 1,200엔으로 조선어와 일본어로 주한일본공사의 기관지 『한성신보』를 창간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일본 외무성은 1895년 3월부터 『한성신보』에 매월 130엔, 7월부터는 170엔의 보조금을 증액해 지급했고, 명성황후 시해 다음해 7월부터는 300엔으로 대폭 증액해 보조금을 주었다. 이는 외무성과 한성신보사의 관언유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을미사변은 외무성의 기밀비를 통해서 창간된 『한성신보』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蔵)나 주필 구니도모 시게아키(国友重章), 편집장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사사 마사유키(佐々正之) 이하 사원 전원, 그리고 부산어학교 출신 스즈키 준미(鈴木順見), 『국민신문』의 기쿠치 겐조(菊池謙譲) 특파원, 『일본신문』의 야마다 츠요시(山田烈聖) 특파원, 『호치신문』의 요시다 유우요시(吉田友吉) 통신원이 가담하고, 미우라의 진두 지휘하에서 조선의 국모를 살해하는 국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일본내각이 주도한 관언민 결탁
전대미문의 국제범죄 사건

미우라가 당시 외상대리로 있던 사이온지(西園寺) 앞으로 보냈던 사건 보고 전보(야마모토 시로: 山本四郎 편 『三浦梧楼 関係文書』 明治史料研究連絡会, 1960년, 89쪽)에 따르면 왕궁에서 무차별 궁녀들을 살해할 때 마침 그곳에 있던 외국인에게 영어로 왕비가 어디 에 있냐? 라고 외치는 증언 장면도 볼 수 있고, 명성황후 살해 현장에는 낭인뿐만 아니라 당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정도의 최고 지식인들에 의해서 저질러 진 사건이다.

명성황후의 살해를 현장에서 진두 지휘했던 한성순보사의 아다치는 1896년 1월 20일 히로시마(広島) 재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 난 후, 1905년7월10일에 일본 외무성의 기밀비 1,700엔 받아 『평양신보』를 창간했다.

그 후 아다치는 그 명성황후시해 성공의 공로로 일본정부의 보호와 지원을 받고 승승장구하여 체신대신(1925~1927), 내무대신(1929~1931), 중의원 의원, 국민동맹 총재(1932~1940) 등을 역임하고 1948년 83세로 사망했다.

명성황후 살해사건 직후의 신문기사

경성특파원인 콜로넬 코커릴(Colonel Cockerill)은 사건 1주일 후인 10월15일에 파리 발행의 『The New York Herald』의 「헤럴드가 뉴스를 제공했다」라는 제목에서 「조선의 대신과 대담을 한다」라는 부제를 붙이고 조선의 왕비가 살해된 것을 크게 보도하고, 이를 구미사회에 알렸다.

10월 16일자의 『The New York Weekly Tribune』은 “조선 왕비의 살해자가 확인되었다. 왕(고종)은 죄수, 위대한 독재자인 왕의 아버지는 친일정부에 이끌려 취임했다고 10월 13일자의 파리의 신문으로부터 인용해 보도했다. 그리고, 왕비는 일본 군대가 성문을 지키고 있었을 때, 살해되었다. 일본 대신이 그 살해 음모를 알고 있었다라는 내용은 눈에 띄지 않았다. 왕은 지금 죄수로 반대파 리더인 아버지 대원군은 신 내각을 친일세력으로 구성할 것이다. 왕비의 측근은 도망했다. 장사라는 일본인이 왕비의 살해범으로서 체포되었다” 라고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 기사 이전에는 왕비 살해사건을 보도한 자료가 없는 것으로 보아 미국에서 최초 왕비살해 뉴스를 보도한 신문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동 신문 10월 30일자에는 「조선의 왕비의 사체가 발견되었다」라는 제목으로10월16일 요코하마(横浜)발 기사를 인용해 “왕의 아버지(대원군)와 그의 추종자에 의해, 최근 공격을 받고 죽은 왕비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일본정부는) 고무라(주타로) 조선 공사에게 만일 일본인들이 왕비를 살해한 것이 증명되면 살해범을 처벌하라 명령했다”라고 보도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이나 요코하마의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 등이 사건 다음날부터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외국언론이 인용하거나 관련자에게서 소식을 제공받았을 것이다. 단지, 이들 신문도 처음에는 일본 내각의 사건 관여를 부정하고 정부의 견해를 전하기만 한 것으로 보여 진다..

도쿄대학 법학부 메이지신문잡지관(明治新聞雜誌館)에 보관되어 있는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 10월 9, 10, 11일자 기사에서 “국왕은 무사하지만 왕비는 행방불명 되었다와 일설에는 몰래 궁궐 밖으로 피신했을 것이다”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미우라는 이전부터 불교에 몰두하고, 출가 입도의 길을 걷고 있었던 인물로서는 1895년 9월 1일 조선공사로 착임한다. 문관이 아닌 육군중장 출신의 군인을 외교관으로 보냈다는 사실은 특수한 임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미우라는 조선에 온 뒤부터 두문분출하고 불경을 외우면서 왕비를 제거할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왕비를 살해한 후에도 엄청난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짓을 하고도 조금도 죄의식은 느껴지 못했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당시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 기사도 있었다.

육군중장 출신으로서 국가를 위한 절대적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워든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자신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을 보인다. 여러 문헌에서 국가주의에 입각하여 목표를 관철하는 군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야마가타와의 동향으로서 군부의 후배로서 강한 유대감이 가지고 있다는 것도 헤아릴 수 있겠다.

명성황후 살해를 계획하고 사건 후 처리를 담당한 것은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강력하게 추천한 사람도 이노우에(井上)였다. 하지만 공사 부임을 거절하는 미우라(三浦)를 최종 결심하도록 군부 최고 권력자인 야마카타 아리토모(山県有朋)의 국가주의적 설득이 유효했으며, 미우라를 공사로 최종 승인한 사람은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오로지 국가주의자들의 한가지 목표 만을 위해 의기투합한 것이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은 일본내각과 군부 최고 권력자들에 의해 저질러 진 국제적 만행으로 밝혀진 것이다.



박 인 식

 

일본학술박사, 일본과 중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해 오다가 현재는 KCJ국제관계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2015년 11월 26일 방영 된 KBS1 TV 특집다큐 「을미사변 120년 명성황후 다시 보다」에 출연해서 일본 현지에서 외교문서를 해독해 명성황후 살해사건을 재조명하고 미우라 수기 등을 통해 일본내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건임을 고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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