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 주간 논평
상태바
저널 주간 논평
  • 이천저널
  • 승인 2007.04.26 14: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행정 절차가 ‘의견 청취’에 불과한 나라

한미 FTA 체결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과 모순 중에 하나는 최대 피해자인 농업인에 대해서는 미련 없이 밀어붙이던 정부가 법률 시장은 개방에서 제외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취한 점이다. 이로써 지식 기반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한미 FTA를 체결한다는 명분이 허울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모순은 많은 전문가들로 하여금 통상 행정의 폐쇄성과 단절을 지적하게 만들었고, 결국 통상 문제에도 이해 관계자의 참여권을 보장하고, 통상 행정의 통합을 제도적으로 담보하는 통상 절차법이 필요하다는 필요성이 여론의 흐름을 탔다. 

잘 모르는 법 얘기를 꺼내서 민망하지만, 법은 체계상 크게 형식법과 실체법으로 나뉜다. 실체법이 법적 권리와 의무를 정의하고 규율하는 법, 이를 테면 민법, 형법 따위를 말한다면, 형식법이란 권리를 주장하거나 부당 행위를 시정하게 하는 수단을 규정하는 관할권이나 소송 절차와 관련된 법으로 민사소송법이나 형사소송법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형식법을 절차법이라고도 한다. 

행정절차법이란 행정 절차에 관한 공통적인 사항을 규정하여 국민의 행정 참여를 도모함으로써 행정의 공정성과 투명성, 신뢰성을 확보하고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한 법이다. 다시 말하면, 행정 의사 형성 과정에 이해관계인을 참여케 하여 행정 운영의 공정성과 민주화에 이바지하고, 공익과 사익의 대립이나 갈등이 생길 경우 행정의 적법·타당성을 확보하여, 권익 침해를 사전에 방지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법이다. 그런데 얼마 전 행자부 자료게시판에 등장했다는 “행정절차법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의견청취에 관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는 문구는 우리가 절차법에 얼마나 무지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예이다.  

그렇다면 통상 절차법은 어떤 지경인가? 우리의 상대방인 미국은 1975년부터 통상법 체제를 가동하고 있다. 여기서 이해 관계자는 두 가지 통로를 통해 통상 협상에 관여한다. 먼저 각 산업의 개별적 이익을 반영하는 부문별 자문위원회다. 농업 분야의 자문위원(농민 대표다)은 미국 무역대표부에 통상 협상의 목적과 전략에 대해 조언을 할 법률적 권리가 보장돼 있다. 만일 어느 FTA에서 농업 분야와 그 밖의 산업 분야 사이에 이해관계가 어긋날 경우에는 위원회는 미국의 전반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산업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평가한다. 위원회의 보고서는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해야 할 필수 문서이며, 미국 무역대표부는 위원들이 활동하는 데 필요한 인력과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떤가? 한국의 농업인 가운데 정부의 통상 정책과 협상에 농업계의 이익을 반영하고, 한국의 종합적 이익을 위해 다른 산업계와 같이 의논할 법적 권리를 보장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런 과정에서 지난 해 권영길 의원에 의해 발의된 것이 ‘통상협정의 체결절차에 관한 법률안(통상절차법)’이다. 권 의원은 최근 한 토론회에서 “현재 한국의 통상 시스템은 통상 협상 전후 과정에 걸쳐 ‘거의 대부분’의 절차를 생략하고, 협상이 체결된 이후 비준동의권만을 국회에게 윽박지르며 국회가 ‘국익’을 위한 거수기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협상개시 전 절차, 협상 진행 중 절차, 협상 체결 전후 절차를 규정하고 있는 통상절차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송파 군부대 이전 문제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부는 군부대 이전으로 이해관계가 있는 지자체와는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을 한 뒤에 주민들을 지역 이기주의자라며 윽박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이천의 골프장 설립 문제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고대법이 형법 같은 실체법보다는 절차법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만들어졌다는 조셉 니담의 연구가 다시금 되새겨지는 시절이다.

이천저널
이천저널
webmaster@icjn.co.kr
다른기사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