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말기의 원폭투하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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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말기의 원폭투하 비화
  • KCJ국제관계연구소장/학술박사
  • 승인 2019.08.25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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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천황제 폐지 두려움 … 항복에 소극적
미, 전후 세계주도권 선점 … 두 번의 원폭투하
KCJ국제관계연구소장/학술박사
KCJ국제관계연구소장/학술박사

미국은 히로시마(広島,1945.8.6)에 원폭을 떨어뜨린 이후, 3일 만에 다시 나가사키(長崎 1945.8.9)에 원폭을 또 다시 투하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원폭투하로 끝이 났지만, 사실상 원폭 없이도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미국은 원폭투하를 통해 국력을 과시하고, 전후 세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미국은 필요 이상으로 원폭 재투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조된 원폭의 실험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트루먼 대통령(Harry S. Truman 재임 1945.4~1953.1)은 “젊은 미국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원폭투하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지만, 대다수 미국인과 역사가들은 원폭 투하가 전쟁을 끝내고 미군의 다수의 전사를 방지했다는 측면에서 군사적·도덕적으로 '정당한 결정'이라고 인식해 왔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영국, 프랑스의 제국주의 전쟁에서 시작되었다. 전 세계적 규모로 독점 자본주의의 모순이 원인이 되었고, 제국주의 사이에서 대립과 분열로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독일과의 전쟁은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중일전쟁에서 일본은 중국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일본 군부는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동남아시아까지 침략전쟁을 확대해 나갔다. 일본은 태평양지역의 패권을 노리고 있었지만, 미국이 최대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에 전쟁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루스벨트 (Franklin D Roosevelt 1882.1.30~1945.4.12.) 대통령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 의회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이 먼저 침략하도록 자극하는 책략을 썼다. 미국과 영국은 중국을 침략한 일본에게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며 경제봉쇄로 대응하자 수세에 몰린 일본은 1941년 12월,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미 정부와 군 최고위층은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해 공격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은 일본의 공격에 대해서 보복을 다짐하며 즉시 선전포고를 했다. 초기 일본은 태평양 곳곳에서 기세를 올렸으나, 1942년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 1942.6.5)에서 패배한 뒤로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참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전선도 아시아 전체로 확대되었다.

태평양에서 미국은 사이판(Saipan)을 함락시키고, 필리핀의 레이테 만(Leyte Gulf)에 상륙하여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미·영·중 3국은 1943년 11월에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을 하였다. 카이로 선언문은 제2차 대전이 끝난 뒤에 일본의 영토 처리문제에 대한 기본방침을 세웠다. 한국국민이 일본의 노예상태에 놓여 있음을 상기하면서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절차에 따라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3국은 「카이로 선언」통해서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천황제를 유지하고자 하여 일본군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1944년 말부터 오키나와(沖縄)를 점령한 미 공군은 일본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지금까지 일본 공격이 대낮에 높은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면서 산업 중심지에 별로 많은 피해를 주지 못했다. 따라서 마리아나 제도(the Mariana Islands)의 기지에서 일본을 폭격하는 새로운 전술을 구사했다. 야간에 낮은 고도에서 네이팜(napalm) 소이탄(焼夷弾)을 투하하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여 서둘러 전쟁을 끝내려 했던 것이다.

1945년 3월 9~10일 밤 도쿄에 대한 최초의 야간 공습으로 도쿄 건물이 25%가량이 파괴되었고, 8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며, 100만 명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 미국은 대규모 지상군의 침공이 없이도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다른 대도시에 대해서도 비슷한 야간 공습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이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고 있었다.      

1945년 4월 29일에 유럽 북서부에 주둔해 있는 독일군의 항복문서로 유럽전쟁은 5월 2일 마침내 막을 내리고 있었다. 항복문서는 5월 4일에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의 사령부에서 조인되었다. 전체 독일군을 포함하는 항복문서는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 대표만이 아니라 소련 대표도 참석한 가운데 조인되었다. 1945년 5월 8일 자정을 기해 유럽에서의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을 맺었다.

일본에 원폭 공격명령을 내린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의 인명피해를 줄이고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원폭공격에 일본을 포함한 극동지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미국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당시 일본은 패색이 짙었고 항복 준비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몇 수십만 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낸 원폭공격은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소련은 유럽전쟁에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전쟁물자를 대여 받으면서도 좀처럼 작전계획을 제시하지 않았고 연합군과 공동보조를 취하지 않았다. 미국은 소련이 뒤늦게 태평양전쟁에 뛰어들어 일본 점령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전쟁을 빨리 끝내려 했다. 소련 문제는 루스벨트에게 골치 아플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전후의 국제정세가 소련과의 관계 여하에 따라 직결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명확한 주적은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공산혁명 세력과 대공황이었기 때문에, 모든 전략의 초점을 소련 견제에 맞췄으며 전쟁을 기업 이익의 개념에 기반을 두면서 경제 부흥의 기회로 삼는 데 몰두했던 것이다.

트루먼은 포츠담에 도착한 다음날 1945년 7월22일에 마침내 오랫동안 기다리던 소식을 보고 받았다. 7월 16일 뉴멕시코(New Mexico)주 앨러머고도(Alamogordo) 에서 원자폭탄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이미 일본을 해치우기 위해서 미국은 소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이것은 트루먼과 국무장관 반스((James Francis Byrnes、1882.5.2- 1972.4.9.)는 동유럽과 만주, 화베이(華北)의 문제를 미국측에 유리하게 해결하는 것은 포츠담의 별궁에 있어서가 아니고, 머지않아 스탈린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되는 원자폭탄의 위력이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은 일본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요구는 아니었지만 일본은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이란 천황 히로히토(裕仁)가 강제로 하야하고 전쟁범죄자로 기소될 수 있는 수치를 감수해야 했다.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알페로비츠 연구서 (Gar Alperovitz 1936.5.5~ 역사학자 겸 정치 경제학자 「Atomic Diplomacy: Hiroshima and Potsdam 1965」)는 해군장관 제임스 포레스틀(James Vincent Forrestal 1892~1949)을 위시한 일부는 “일본인들에게 무조건적 항복이 천황의 강제퇴위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확약해 주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무성 간부회의에서 일본은 더 이상 전쟁하는 것은 불리하다는 생각에는 거의 공감하고 있었지만 무조건 항복에는 갈등이 많았다.

일본국민 중에는 공산당원도 있지만 대부분은 천황제를 폐지하는 것 등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신문에는 노코멘트로 전문을 발표하는 것을 일동 찬성하는 것으로 대신에게도 전했다. 하지만 소련이 극동아시아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다면, 중국에 있는 일본의 주력부대가 아직 건재하였고 이 군대로 일본을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최초 원폭투하 기사는 1945년 8월 9일 『아사히 신문』에서 “히로시마에 적 신형포탄/ B29 소수기로 내습 공격/ 상당한 피해, 상세한 것은 현재 조사 중/ 낙하산에 매달아 공중에서 파열/ 인도를 무시하는 참혹한 신폭탄“ ※이때까지도 원자폭탄이라 것을 모르고 신형폭탄이라고만 명명했다.
최초 원폭투하 기사는 1945년 8월 9일 『아사히 신문』에서 “히로시마에 적 신형포탄/ B29 소수기로 내습 공격/ 상당한 피해, 상세한 것은 현재 조사 중/ 낙하산에 매달아 공중에서 파열/ 인도를 무시하는 참혹한 신폭탄“ ※이때까지도 원자폭탄이라 것을 모르고 신형폭탄이라고만 명명했다.

일본정부는 외무성 당국을 중심으로 대소교섭에 대한 기대감에서 즉시 수락하는 방침을 피하고 최종적으로는 스즈키 관타로(鈴木貫太郎: 1868.1.18- 1948.4.17) 수상의 ‘단지 묵살할 뿐’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전쟁지속의 강한 의사를 내외에 어필하였다. 이 묵살 성명은 포츠담 선언거부로 받아들여진 것은 당연하며 미국은 원폭투하라는 최종수단에 호소하는 구실을 얻었다. 일본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군부와 스즈키 수상의 항복에 대한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고귀한 많은 민간생명을 앗아가도록 했다.

실제 트루먼에게는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면서 일본과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몇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천황을 사면해 달라는 일본측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련군대가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할 때까지 기다린 후 일본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종용할 수 있었다. 해상봉쇄를 통해 보급을 차단해 화평을 요구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투루먼은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The New York Times』의 군사분석가 핸슨 볼드윈(Hanson W. Baldwin 1903.3.22~1991.11.13.)은 전쟁직후 이렇게 썼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이 있었던 7월 26일의 시점에서 적(일본)은 이미 전략적으로 속수무책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쓸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답은 거의 확실히 부정적이다."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서라면 트루먼은 원자폭탄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고 분석하였다. 그러나 트루먼과 그 보좌진은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고 원자폭탄으로 일본을 초토화시키기로 결정했다.

또한 루스벨트 대통령 지시로 전쟁 비서관 헨리 스팀슨에 의해서, 1944년 11월 3일에 설립한 ‘미국전략폭격조사단'(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은 일본이 항복한 뒤 수백 명의 일본 민간인 및 군대 지도자들을 인터뷰하고 전쟁 직후에 다음과 같이 보고한 기록이 있다. "모든 사실에 대한 세부적인 조사와 관련된 증언을 토대로 이를 확인해 볼 때, 설령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일본 본토에 대한 어떤 침공도 계획하거나 기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확실히 1945년 12월 31일 이전에, 아니 아마도 11월 1일 이전에 일본이 항복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는 바이다."라고 보고하였다.

일본군의 협상파 측에서는 1941년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소련에게 종전(終戰) 중재를 설득하는 것이고, 주전파 측에서는 유리한 종전 조건을 얻어낼 때까지 미국에 맞서 결사 항전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는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이후에도 고려되었다.

그러나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을 투하했지만, 일본은 오로지 8월 8일 소련의 태평양전쟁 참전 선언에 신경만 썼고, 결국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 이외의 선택이 없다고 정치적 판단을 했다. 당시 소련의 막강한 군사력을 고려할 때, 일본이 소련과 미국을 상대로 동시 전쟁을 치를 능력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인류의 최대 살상무기를 통해 민간인 수십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두 번의 원자폭탄을 사용한 것은 소련이 아시아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얻어 낼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전 후 한국, 만주국, 대만 등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영토나 극동 및 태평양 지역 전체에 대한 처우를 결정할 때 소련에게 발언권을 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미국은 그 지역의 완전한 패권을 차지하게 될 수 있었다.

미국은 가공할 전략무기를 과시함으로써 전쟁의 성과를 나누는 협상에서 소련을 압박하려는 노림수도 있었다. 미국은 실제로 원자폭탄 덕분에 패전국 일본에 독점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압도적 군사력의 배경에는 전후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던 것이다.국제질서의 파수꾼으로 군림하는 미국은 지구촌 곳곳에 군사시설 확충과 미군의 재배치와 MD구축을 완성하고 있다. 이러한 군사시설 강화는 국제사회에서의 군축경쟁을 부축이고 있다.

과거 전쟁의 교훈을 통해서 미국은 「전쟁피해보상법」(War Hazards Compensation Act)을 개정 확대·적용하여 원폭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보상을 지원해야 하며, 원폭투하는 잘못된 정치적 결단이었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무고하게 사망한 조선인과 원폭희생자, 인류에게 반성과 책임을 천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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