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 다시 읽는 내나라 사람들의 낯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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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다시 읽는 내나라 사람들의 낯선 이야기
  • 이천저널
  • 승인 2007.02.16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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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소년 시절 황해도에서 겪은 아주 친근한 우리 자신의 이야기

『 압록강은 흐른다 』/ 이미륵 글, 전혜린 옮김, 범우사

“당신도 읽으면 알게 되겠지만 나의 소설은 나의 소년 시절에 체험한 일들을 소박하게 그려 보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러한 체험들을 서술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기술적이고 설명적인 묘사는 피했습니다. 동시에 동양인의 내면 세계에 적합하지 아니한 세계적인 사건들은 비교적 조심성 있게 다루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순수하게 그려냄으로써 한 동양인의 정신세계를 제시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아주 친근한 것으로 바로 나 자신의 것입니다.”

이 글은 이미륵이 자신의 책 『압록강은 흐른다』를 출판한 피퍼 출판사 사장에게 보낸 글 중의 일부이다. 독일어로 쓰여진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책을 지은이인 이미륵의 말로 이 글을 시작하고 싶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책은 그의 말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옥계천’의 장면이 일부 발췌되어 실려 있기도 한데, 사실 나는 이 책을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에 읽었다. 전혜린 에세이집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이미륵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후 나는 서점을 여러 번 드나들며 이 책을 구하려 했다. 하지만 번번이 서점 여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지금은 모든 도서를 찾기 쉽도록 전산화가 되어 있으니 그 때처럼 허탕치고 맥 빠질 일도 드물어졌을 것이다. 하여간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에서 이 책을 구입했다. 그때 얼마나 기뻤던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읽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책갈피만 만지작거렸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책을 읽다 중간에 멈춰야하는 불행을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 방에 들어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읽었던 이 책을 가끔 드나드는 시립도서관 어린이 열람실에 꽂혀 있는 것을 보자 기분이 묘했다. 이제는 많이 알려졌구나, 쉽게 구해 볼 수 있구나, 우습게도 배반감 비슷한 기분까지 들기도 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나는 불현듯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설날 때문이다. 거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뒹굴뒹굴 받으며 그다지 즐겁지 않은 설날을 손가락으로 꼽아 보고 있었는데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설날’이라는 단서를 손에 쥔 형사처럼 나는 이 책 어딘가에 있을 내 무의식속의 한 조각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마치 처음 읽는 책처럼 아주 낯설게만 느껴졌다.

태어난다는 것 그 자체가 불행처럼 느껴지는 1899년에 이미륵은 황해도 해주의 천석꾼인 부유한 지주의 집에서 태어났다. 아. 그랬구나.

그가 아명인 ‘미륵’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사연과 다섯 살 남짓 되던 때부터 시작되는 그의 즐겁고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아버지와 훈장님에게서 한학을 공부하고, 때로는 아버지와 함께 시를 즐겨 읊기도 한다. 이 책의 간결한 문체와 서정적이고 알맞은 표현 또한 그 영향이 아닌가 싶다. 동양인의 정신세계를 나타내 보이고 싶었다는 이 말의 대상은 외국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외국인처럼 이 책 곳곳에서 우리의 생활과 문화를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우리의 것이기는 하지만 벌써 우리에게서 멀어져 있는 것들.

다시 읽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데 짧은 한 숨이 저절로 나왔다. 아, 이 책은 정말 아름다운 책이구나. 혹시 그래서 다시 읽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 그리고 이 책에 설날에 관한 이야기도 길지 않지만 꼼꼼하게 보여주고 있다.

‘즐거웠던 설놀이’ 일화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어떤 놀이를 배운다. 윷놀이와 비슷한 방식인데 다만 관직에 있는 관리를 내 쫓거나 승진시키는 놀이다. 주인공은 사촌들과 설날에 받은 세배 돈으로 매일 밤 놀음판을 벌인다. 그러나 결국에는 크게 싸움이 일어나고 아버지에게 들켜 무서운 회초리를 맞는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명절에 한번쯤 이와 비슷한 일을 겪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올 설날에도 틀림없이 그렇게 혼나는 경험을 쌓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길일행/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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