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이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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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이들뿐이다
  • 이천저널
  • 승인 2007.02.0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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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의 미소 』크리스 도네르 글/ 필립 뒤마 그림/ 김경온 옮김/ 비룡소

몇 해 전의 일이다. 아이를 따라 유원지로 소풍을 갔는데 그곳에 목마 타기라는 놀이기구가 있었다. 카우보이모자를 어색하게 쓴 아이는 조금은 불안한 표정으로 말 등에 올라탔는데 앉자마자 금방 한 바퀴의 원을 돌고 왔다.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어린 손님들 때문에 마음이 급한 진행요원은 아쉬운 아이가 내릴 생각을 않고 그대로 앉아 있자 엄마인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이는 어서 내리라는 내 말을 못 들은 척 하면서 말갈기만 계속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태워줘서 정말 고맙다.”
진행요원은 아이의 말에 겸연쩍어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말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아이의 고맙다는 말 때문에, 그저 낡고 초라한 목마에 불과했던 말이 생생한 색을 입힌 듯 달리 보였다. 이런 느닷없는 감동을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종종 받을 것이다.
“그래, 맞아! 어른들에게 기쁨을 되찾아 주는 것은 역시 아이들뿐이야!”
내가 소개하려는 『말의 미소』라는 책도 이런 말로 끝을 맺는다.

한 작은 시골학교에 부임해 온 선생님은 황폐해 보이기만 하는 마을의 풍경과 어른들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보며 결심을 한다.
“더 늦기 전에 아이들이 무엇인가에 흥미를 갖도록 해야 해.”

그래서 선생님은 말을 사기로 결심한다. 이 계획으로 인해 아이들에게서 새로운 열정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서 더 바랄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말 구입비가 문제였다.

그러나 어른들은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어른들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으며, 그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에 골몰했다. 그것은 가뭄, 세금, 특히 망할 놈의 ‘낙농 할당제’같은 것들이다. 삶의 고단함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말의 구입비는 삼천 프랑이다. 이중에서 절반은 결국 선생님의 돈으로, 천 프랑은 군청의 지원금 그리고 나머지 오백 프랑은 아이들이 저금통을 깨서 가져온 동전들로 가까스로 마련한다.
아이들의 부모들이 ‘낙농 할당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기 위해 파리로 떠난 날, 아이들은 말을 가지러 백작의 사육장으로 노래하며 길을 나선다.

안내를 받고 들어간 백작의 으리으리한 거실 탁자에 선생님은 준비해 온 지폐와 자잘한 동전들을 쌓아놓는다. 백작은 마치 그 돈에서 고약한 냄새라도 나는 듯이 언짢은 기색을 보인다.

그 거만한 백작은 당신들에게 적합한 말이라며 ‘비르 아켕’이라는 어쩌면 도살장으로 보내졌을 은퇴한 경주 말을 내준다.

아이들은 비르 아캥을 보며 환호성을 지른다. 말이 자기들을 보고 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말은 고통 때문에 얼굴을 찡그린 것인데 아이들은 그걸 몰랐다. 선생님도 역시.
이제 비르 아켕은 아이들의 말이며, 아이들의 애인이며 보물이 되었다. 학교로 돌아가는 17킬로미터가 되는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말은 더 크게 웃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학교에 도착해서 쓰러진 비르 아켕이 무시무시한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아이들은 그제야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안다.

연락을 받고 학교에 온 수의사는 고통에 찬 비르 아켕을 ‘장폐색증’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경우에는 말을 안락사 시킬 수밖에 없음을, 수의사는 그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수의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동물은 동물로서 다룰 뿐, 사람들이 자신들의 애완동물 때문에 슬퍼하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려고만 했었다.
그러나 학교 운동장에 누운 비르 아켕, 아이들과 선생님의 열망 앞에서 수의사는 자신의 판단이 몹시 흔들렸다. 그리고는 비르 아켕을 수술한다. 

비르 아켕은 ‘사막의 도시’란 뜻이라 한다. 지은이는 왜 ‘사막의 도시’란 이름을 말에게 지어 주었을까. 인색하고 거만한 백작과 눈앞의 현실에 탄식하고 절망하는 부모들의 세상인 이 사막 같은 도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말라는 지은이의 뜻이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를 통해서 어른은 이 세상을 다시 새롭게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황폐해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아무 희망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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