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의 기준을 주는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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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기준을 주는 지도자
  • 이천저널
  • 승인 2007.01.04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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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백 효양고등학교 교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하는 말들은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 기준은 매우 다양하며, 세밀하게 분류하면 인류의 인구수와도 같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몇몇의 위대한 학자들에 의해 인류의 생각들이 단 몇 개로 분류되면서 그에 대한 토론을 거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거나 자기의 환경 또는 이권에 얽혀서 어느 한쪽을 지지하게 되었다. 대체로 그러한 기준들은 인류의 삶의 형태와 경제적인 규모 그리고 힘의 균형에 따라 이쪽 저쪽으로 옮겨다니게 되었고, 그것은 시대의 조류를 나타내는 역사의 기점이 되었다.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던 것들은 시대가 흘러가면서 상대적인 문제점을 드러내게 되었고, 상대적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오히려 절대 진리인 것처럼 생각되는 시대도 거쳤다. 늦은듯 보이는 평가이지만, 공산주의도 한 때는 프로레타리아 계급의 이상향과도 같은 평가를 받는 삶의 기준을 주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쪽 계급만의 입장을 대변할 뿐 모든 인류가 처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다. 게다가 평준화가 가지는 비생산성의 속성을 간과한데다 소수의 권력 집중으로 민주를 외면해버리는 모순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우를 범하였다. 하지만, 자본주의 역시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데, 자본의 거대 권력화와 부분적인 인본주의적 사고의 말살이 전체 체제에 만연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기준이 세상을 뒤덮고 있어도 그 기준은 인간이 세운 것이며, 언제나 절대적인 기준으로 세상의 가치를 재려고 해도 어느 시점에서는 기준에 속하는 여러 정의(定義)가 시대 흐름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혹 정의는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민심이 변할 수도 있고 그 기준을 적용하는 주체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기준은 언제나 다시 확인하고 또 다시 정의하는 과정을 되풀이 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요즘 고구려 건국을 소재로 한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의 처지는 그 기준을 바꾸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단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예전에는 유민들을 구했기 때문에 우리편이지만, 지금은 유민들을 구한 전력 때문에 적이라는 식의 이야기 전개는 그런 기준이 얼마나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제 또 한해가 간다. 그저 한해가 간다는 의미로는 별 것이 없겠으나, 2000년대의 처음 몇 년간을 살아본 후 2000년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거국적으로 생각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매우 의미가 깊은 때이다. 우리는 지난 60년간 대한민국으로서 격동의 세월을 달려왔다. 서구의 오랜 민주화 과정과 산업화의 오랜 세월을 단숨에 달려왔다. 그동안 좌우의 세력다툼의 시대도, 독재의 시대도, 민주화의 시대도, 산업화의 시대도, 노동운동의 시대도 보냈으며, 격랑 속에서 한류의 시대가 왔다고들 한다. 한류라고 하는 것은 이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많은 종류의 성과들을 세계에 내놓아도 결코 외면당하지 않고 환영받는 흐름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것이 기술적인 것이든, 예술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유형의 것 또는 무형의 것 모두 세계의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다면 이제 격동의 세월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격동의 터널을 빠져나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고 해도 잘못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난 60년 동안 우리에게는 참된 지도자가 없었다. 어느 한쪽만 대변하는 그런 지도자는 있었어도 어느 계층, 어느 누구에게도 존경을 받고 길이 추앙받는 지도자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짧은 60년 동안에 수백년간의 서구의 세월을 경험하고 이런 한류의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것을 뜻한다. 앞으로 이렇게 대단한 우리를 이끌어줄 참된 지도자 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짧은 60년간 수도 없이 뒤바뀐 기준을 가지고 인류의 역사 속에 나타난 모든 문제를 다 토해버렸던 지난날을 딛고 모든 국민이 다 만족할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새로운 덕목을 가지고 우리에게 희망과 참다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는 그런 역량이 있는 인재가 아닐까? 세밑에 서서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런 지도자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 앞에 서 있는 저 사람들인가, 아니면 아직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은 그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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