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우의 왈가왈부, 꼬리치는 논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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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우의 왈가왈부, 꼬리치는 논술 <5>
  • 이천저널
  • 승인 2006.12.21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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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가치가 아니라 근거다

‘나는 무엇을 쓰기를 원하나?’가 아니라
‘독자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심 기울여야

지난 밤에 나는 논술이에게, ‘채점하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 논술 답안지를 읽는 것은 아니다’는 말을 했었다. 아침 산책길에 나는 그 말을 다시 꺼냈다. 극단적인 결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 말을 기억해 두면 좋겠다고 하자, 논술이는 이렇게 말을 바꿔 물었다.
“논술 답안지의 독자는 채점자라는 말이지?”
“그래, 논술문을 쓰는 사람이 채점자가 아니란 말이야. 네 답안지의 유일한 독자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어?”
“나는 유일한 독자(채점자)의 취미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아. 등산이든 낚시든 궁금하지 않아. 누구나 그렇겠지만. 물론 난 내가 쓴 글을 채점자가 제대로 읽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없어. 내 관심을 내 자신의 논리 전개에만 집중할 생각이야.”
내 귀에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아침부터 제법 똑똑한 척을 하는 논술이가 기특해 나는 모처럼 동의해 주었다. 
“그래. 독자가 너보다 대단히 우수한 사람이라고 미리 너그러워질 필요가 없어. ‘나는 무엇을 쓰기를 원하나?’가 아니라 ‘독자가 무엇을 이해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해. 그래야 네 논거가 제자리를 찾을 거야. 채점자를 ‘우둔한 독자(dumb reader)’로 생각해. 그런 독자도 알아들을 수 있는 글을 써나가자는 말이지.”    
논술이가 독자 탓만 하는 강아지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걱정에서 나는 다시 질문했다.  
“논술문을 포함한 모든 글들은 글에서 작자를 ‘분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건 무슨 뜻이지?” 
“발표된 이상 그 글은 그 작자의 것이 아니다. 말한다는 것은 전제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아침부터 또 시작이군, 하는 불만을 참는 모양인지 논술이의 억양이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산책할 때는 산책만 합시다, 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논술이의 불만에 대해서 나는 대체로 무시하는 편이다. 내가 나뭇가지를 꺽어 땅바닥에 세 개의 문장을 적었다. 논술이도 별 수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논술이는 마릴린 몬로에게 토끼 한 마리를 주었다. (그녀에게 판매한 것이 아니다)
-논술이는 마릴린 몬로에게 토끼 한 마리를 주었다.(그녀가 기대했던 강아지가 아니다)
-논술이는 마릴린 몬로에게 오리 한 마리를 주었다.(다른 사람이 아닌 마릴린 몬로에게)
“예컨대 네가 말할 때는 네 말의 강세나 억양에 따라 의미를 암시할 수 있겠지. 그런데 글에서는 밑줄친 부분의 의미가 정확히 설명되어야 할 거야.”
“마릴린 몬로, 좋지?” 논술이가 딴청을 부렸다. 
“좋은 건 나도 알아. 24시 감자탕 집에 가봤어? 거기 주방장 따님이 몬로를 닮았다며? 본 적 있어?”
“확실히 닮았어. 그래서 난 주방장하고 사이가 안 좋아. 주방장은 날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아가씨는 우리 동네에 여자 조기 축구회가 없는 게 큰 불만이라며?”
“주방장도 축구회 가입한 뒤로 한 번 밖에 안 나왔어. 그 사람은 주방에서 24시간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보다 논술이, 너는 공부하기 싫을 때는 그냥 입을 쉬는 편이 어떨까?”
“그러면 건강에 좋겠어?”
“그런 문제가 아니야.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근거의 문제라고.”  
“아침부터 말이야, 최소한 마릴린 몬로가 주는 심리적인 부담까지 논증하려고 애쓸 건 없잖아?”  
“대부분의 논증은 어떤 주장에 대한 근거로부터 전개되지. 네 주장이 계속되는 동안 3개의 요소를 소개할 수 있어. 단정, 반론, 보증. 네가 설명해 봐. ” 
“단정(qualifier)은 주장의 강함입니다. ‘아마, 확실히, 반드시’, ‘~할 가능성이 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수익보장(광고)’ 등이 그렇습니다. 반론(rebuttal)은 반대 논증에 대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 아니라면unless’ 등의 표현이 그렇습니다. 보증(backing)은 증거를 보강하여 확정지을 만한 경험이나 이론을 제시하게 되는 논증의 마지막 권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 좋아, 그런데 가장 먼저 무엇을 쓸 것인지부터 생각해야겠지? 주제 설정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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