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외설 논쟁은 끝없이 계속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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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외설 논쟁은 끝없이 계속되는가?
  • 이천저널
  • 승인 2006.12.21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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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과 달리 논증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반박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논증은 다른 논증보다 더 타당하거나 덜 타당할 뿐이다.

이천에서 논술 따라잡기

정의의 문제는 비단 재판의 경우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기 민망할 정도로, 어떤 논쟁에서 논점을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은 토론자들이
상대편의 의견이나 질의와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주장을 펴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아왔습니다.

다음 두 사람의 입장을 들어봅시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인격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정직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능력조차 가지지 못했다. 힘으로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타인의 힘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권리는 없다. 인종이나 종교, 사회적 신분 때문에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하며, 피부색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는 점 때문에 고통 받아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주장은 민주주의의 기초이며, 나는 그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두 사람의 의견은 서로 다른가요?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은 평등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따지는 논쟁처럼 여겨지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것을 하나의 용어로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모두 ‘평등’이란 공통된 개념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사용한 ‘평등’이란 말이 서로 다르게 쓰이고 있다는 겁니다.
앞서 말한 사람은 ‘평등’이란 말을 ‘동일한 조건’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은 똑같은 크기, 형태, 육체적 힘,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불평등은 인간은 동일한 조건 속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가 말한 ‘평등’이란 말에는 ‘동일한 기회’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동일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평등은 인간에게는 동일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입장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서로의 견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주장은 모든 인간이 동일한 조건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입장의 차이는 단지 평등이라는 용어를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한 데에서 비롯된 오해이지 진정한 견해의 차이는 아닙니다.
이처럼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주요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논쟁이나 논술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지요.
얼마 전에 한 교사가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자신과 아내의 누드 사진을 게재했다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학부모들의 고소로 검찰에 기소되어 판결을 받은 일을 여러분들은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은 우리의 역사 속에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1959년, 영국의 로렌스라는 작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는 책을 펴냈을 때도 영국 검찰은 그 작가를 외설 서적에 의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즐거운 사라』의 마광수 교수가, 또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장정일이 모두 같은 문제로 검찰에 기소되어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 재판에서 검찰 측과 변호인 측 모두에게 성패를 건 가장 중요한 쟁점은, 외설 서적이란 무엇인가? 외설 서적이 그것을 읽는 사람들을 부패하고 타락하게 만든다면, 그 부패와 타락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 부패하거나 타락한 것 같다는 결정은 누가 내리는가? 우리는 모든 저작물에 외설의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좀더 관심 있는 분은 강금실 변호사의 장정일에 관한 변론 과정을 기록한 에세이를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정의의 문제는 비단 재판의 경우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기 민망할 정도로, 어떤 논쟁에서 논점을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은 토론자들이 상대편의 의견이나 질의와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주장을 펴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어떤 개념에 대해 서로 동의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아주 이성적인 논쟁의 당사자들이라 할지라도 대개 사실과 가치에 대한 의견의 차이, 그러니까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어느 것을 더 선호하는가 하는 중요성과 취향의 문제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의견의 불일치를 가져온 한 원인을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쉽게 합의에 이르기는 어렵습니다.
증명과 달리 논증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반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논증은 다른 논증보다 더 타당하거나 덜 타당할 뿐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논쟁의 당사자들이 서로의 견해 차이를 드러내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가치관의 차이를 조정하여 협상이나 타협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자신들의 사용하는 용어에 관한 공통된 이해만큼 기본적인 문제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대개 조선 시대 이름난 성리학자인 퇴계와 율곡을 알고 있을 겁니다. 조금 더 기억력이 좋은 분들은 퇴계의 주리설(主理說)과 율곡의 주기설(主氣說)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성리학의 사단칠정론에서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하고 기(氣)가 따르며, 칠정(七情)은 기가 발하고 이가 기를 탄다는 입장이 퇴계의 주리설이고, 사단칠정이 모두 기가 발하고 이가 기를 탄다는 입장이 율곡의 주기설입니다.
이 견해 차이에서 영남학파의 주리설과 기호학파의 주기설이 갈리고, 두 견해는 후학들에 의해 반복되면서 계속 간극을 벌여 도저히 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다산 정약용은 퇴계와 율곡의 차이는 처음부터 견해가 다른 것이 아니라 이기(理氣)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다른 데에서 온 오해라고 주장했습니다. “내가 일찍이 두 분의 글을 취해 읽고, 꼼꼼히 그 견해가 말미암아 나뉜 곳을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두 분이 말한 이와 기는 글자는 비록 같지만 가리키는 의미는 부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퇴계의 이기는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가리키는 협의의 개념이었고, 율곡의 이기는 사물의 근본적인 법칙인 형이상과 사물의 형질인 형이하를 가리키는 광의의 개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정의에 대한 오해가 수백 년 동안 마치 건널 수 없는 강처럼 우리나라 성리학계를 갈라 놓았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개념을 정의하는 일은 모든 논의의 시작이며,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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