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면 우리는 깨 송편을 고르고…
상태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면 우리는 깨 송편을 고르고…
  • 이천저널
  • 승인 2006.09.28 12: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이 돌아왔다. 거리는 며칠 고향을 오가는 인파도 붐빌 것이다. 고향으로 가는 차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리면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올해 대학에 들어가는 조카와 얼마 전 홀로 된 작은집 아주머니 얘기가 나올 것이다. 그 생각의 끝자락에 이르면 전 부치는 돼지기름 냄새에 절은 앞치마를 두른 노모의 거친 손등도 보게 될 것이다. 차창 밖으로 빨갛게 익은 감나무가 보이고 늦은 대추는 아직 알록달록 물들어 있다. 그렇게 우리는 달 밝은 고향으로 간다. 그리고 어쩌면 그곳에서 어느새 ‘늙으신 부모님’이 되어 버린 자기 자신을 만날지도 모른다.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쩨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팟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물으며 힌 가루 손이 되여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섣달에 내빌날이 들어서 내빌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엔 쌔하얀 할미귀신의 눈귀신도 내빌눈을 받노라 못난다는 말을 든든히 여기며 엄매와 나는 앙궁 위에 떡돌위에 곱새담 위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내빌눈 약눈을 받는다. 이눈 세기물을 내빌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어도 먹을 물이다

- 백석 시집 『사슴』, 「古夜」 중에서
백석 1912년 평북 정주 출생. 1930년대 <삼천리 문학>,  <문장>, <인문평론> 등에서 활동. 시집

전에는 추석날이면 거리에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 한복 차림이 명절 분위기를 돋웠었는데 요즘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 언니에게는 다섯 벌쯤 한복이 있었다. 그중 세 벌은 안에 패티코트를 받쳐 입는 화려한 파티형이었다. 언니는 추석이나 설날이면 한복을 입었었다. 자기는 어깨가 좁아서 한복 맵시가 난다고 자랑했었다. 나는 한 번도 한복을 입어 본 적이 없다. 아, 딱 한 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상복을 입어 본 게 전부다. 하긴 내 기억에는 없지만 돌 사진을 보면 그때도 한복을 입었었다. 그런 나는 두 번 한복을 입어봤구나. 한복을 잘 입어내는 사람은 매사에 튀지 않고 대범하게 잘 살아내는 사람인 것 같다.

- 황인숙 산문집 『목소리의 무늬』, 「추석 즈음」 중에서
황인숙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외 다수. 동서문학상(1999), 김수영 문학상(2004) 수상

감나무가 서 있는 밑자리를 파서 마당귀의 수북한 감잎을 묻었습니다.
어느덧 다 가버린 가을을 묻듯.
밤이 내려 망연히 창변에 앉아 있는데 와
대단한 달이 창이 넘치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달을 본 지 오래입니다.
언제 저만하지 않았던가요.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습니다.
저 달의 한 자리를 터서
당신의 손을 붙잡고 들어서고 싶었습니다.
두근두근 떠오르는 달입니다.
보니 보입니다.
모든 것은 보면 보입니다.

- 장석남 산문집 『물의 정거장』, 「창에 넘치는 달」 중에서
장석남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외 다수. 김수영 문학상(1992), 현대문학상(1999) 수상
  

나는 거의 할머니랑 둘이 놀았다. 새벽 다섯 시 정도가 되면 어머니, 아버지는 들일을 나가고, 일곱 시 정도가 되면 누이들이랑 형은 학교에 갔다. 나는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아 자연히 할머니와 둘이 집을 지키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어린 나보다 지능이 높지는 않을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자주 싸웠다. 먹을 것이 없는 집이라서 주로 어머니가 삶아 놓고 간 감자나 고구마를 두고 누가 하나라도 더 먹는가로 싸웠다.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깨니 밖이 환했다. 부엌에서 콩나물 삶는 냄새가 났다. 할머니가 가마솥에 콩나물 시루를 통째로 삶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콩나물 삶는 모습을 옆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궁이의 불 속에 타오르는 뜻 모를 슬픔, 할머니와 나는 서로의 입 속에 콩나물을 하나씩 넣어주었다. 할머니 하나, 나 하나. 할머니 둘, 나 둘. 아궁이에 타오르는 불빛과 서로의 얼굴에 흐르던 따뜻함은 지금도 내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 있다.   

 - 박형준 산문집 『저녁의 무늬』, 「콩나물 삶는 냄새」 중에서
박형준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외 다수. 동서문학상 수상

이천저널
이천저널
webmaster@icjn.co.kr
다른기사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