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3・1운동으로 무력적인 식민지 통치의 비판여론 고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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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3・1운동으로 무력적인 식민지 통치의 비판여론 고조(2)
  • 박인식 교수
  • 승인 2010.05.10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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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일제 식민지시대에 동아일보(東亜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시사신문(時事新聞)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허가를 받아 당시 식민지 조선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민간지였다.

시사신문은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손  선수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 말소 보도사건으로 자진 폐간되었지만, 동아일보(東亜日報)나 조선일보(朝鮮日報)는 오늘날까지 급성장을 거듭하여 한국의 대표 언론기관이 되었다.

그래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식민지시대의 신문경영과 논조, 그밖에 중요한 필화사건이나 비화에 관해서 사료를 분석하여 게재한다. 특히, 일제 식민지하에서 언론활동과 한민족에게 끼친 영향, 민중과 신문관계 등에 대해서 연재하고자 한다.

여기에 연재된 모든 내용에 관한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에게 있음을 밝혀두고, 기술된 내용의 입증사료나 참고문헌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본문 중에 삽입해 독자들에게 쉽게 이해하도록 하였다.

1회에서 7회 연재까지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의 조선총독부 허가배경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8회 게재분 부터는 식민지 전 기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행적에 관해서 연재한다.

일제의 무력적인 식민지지배는 3・1운동의 원인이 되었고, 이에 대한 국내외 신문의 논평은 대부분 가혹한 무력 통치와 조선 언론계의 말살을 주원인으로 꼽고 있었다.

1919년 7월 23일자 도쿄아사히신문의 다치바나(橘破翁) 경성(서울)특판원이 쓴 논설에서는 “그 근본 방침인 새로운 간행물의 불허가주의, 이전, 개제, 내용변경 등에 대한 불인허 방침은 여전히 답습되고 있다. 조선의 언론압박은 단지 간행물 뿐 만 아니고 일체 정치적 집회, 연설 등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하다”라고 밝히고 조선의 언론・집회・결사 등의 억압상황을 구체적으로 비판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최대 기관지인 경성일보의 사장인 소에지마 미치마사 (副島道正)는 1919년 11월 16일부터 도쿄아사히신문에 3회 걸쳐 게재한 논설에서 “본시 극도로 압박을 하여 언론의 자유를 줘서는 안되고 만약 조선인에게 참정권과 관직을 얻지 못하게 하고, 또한 교육과 언론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전도는 암흑 뿐, 그와 같이 반항적 정신을 품지 않는 자 과연 몇이나 될까?(중략)…본국에 대해서 충성을 강요하면 조선통치는 필히 비참하게 실패로 끝날 것이니라”라고 총독의 통치방식과 조선언론의 현실 상황을 지적하면서 강도 높은 비판기사를 게재하였다.

게다가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会)회장을 역임했던 송병준 (宋秉畯)조차도 하라(原)를 방문한 자리에서 조선어 민간신문 허가를 제안한 1919년10월 2일자의 하라(原敬)일기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그는(송병준) 조선어 신문을 발행할 필요성을 설명하고 그 계획안도 제출하였으며 나는 그 일을 지난번에 듣고 동감을 표시하였기에 각별히 고려하건데 근일 미즈노 정무총감이 도쿄에 올 터이니 그 때 만사 협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자 그가 쾌히 승락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하라(原)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인에 의한 신문발행은 민중의 염원이기도 하였고 일본 내각에서도 더 이상의 조선 언론계를 억압하면 식민지지배의 어려움이 더 한층 커질거라는 우려때문에 논란되고 있었던 시기였고, 하라(原)도 송병준의 제언에 대해 어느 정도 납득하고 있었던 같다.

3・1운동을 계기로 식민지통치의 어려움을 숙지하고 있었던 총독 사이토(斎藤)는 1919년9월2일 경성(서울)에 부임한 다음날 「총독부 및 소속관서에 대한 시정방침 훈시」에서 “언론・집회・출판 등에 대해서는 질서 및 공안의 유지에 방해하지 않는 한 상당한 고려를 하여 민의창달을 헤아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사이토(斎藤)의 「치선 방침」(治鮮方針) 훈시에서도 “언론・집회 등에 대해서는 만약 질서 공안의 유지에 방해되지 않은 한 이것을 허용함”이라고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겠다고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조선식민지 통치방침의 전환은 수상 하라(原)가 사이토(斎藤)와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郎)를 총독과 정무총감으로 임명 직후에 직접 작성해 건네 준 「조선통치사견」(朝鮮統治私見)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하라(原)의 뜻에 따라 식민지통치의 총실무를 맡고 있는 정무총감 미즈노(水野)는 조선에 부임 3개월을 맞이하여 조선관계의 명사들을 초대한 석상에서 “언론의 자유를 주고, 신문출원의 조건을 심의해서 적절히 허가를 할 방침”이라고 표명해 총독부 관계부서에서 이미 조선어 신문허가가 심의 중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자작 사이토전』(子爵斎藤傳)에서는 “신시정 전에는 조선 내에 있어서는 언문(諺文)신문의 발행을 제한하고 신규 발행은 쉽사리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지만, 이와 같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해 민의의 창달상 유감이 남지않게 그 방침을 바꿔, 다이쇼8(大正8: 1919)년 12월 이후 경성에 있어서 조선인이 경영하는 언문사용의 제 신문의 발간을 허가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같은 내용으로 미뤄 보면, 총독부에서 1919년 12월부터 민간지를 허가해 주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 소개: 박 인식

   
 
이천시 출생. 이천중・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언론학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 버릿츠 수료. 일본국립 야마구치대학 동아시아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정치・언론 박사( Ph.D.). 일본 식민지문화 학회, 일본 정치・경제사 학회 회원. 일본국립 도쿄 가쿠게이 대학을 경유하여, 현재는 중국 동북사범대학 인문학원 교수.

저서 및 번역서: ・일제의 조선지배에 있어서 정치 언론상호 관계(일본어 판: 2009년).
・일제의 조선통치와 언론(한국어 판: 2004년. 
・침략전쟁(한국어 번역: 범우사, 2006년) 외 다수.

이천시 출생. 이천중・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언론학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 버릿츠 수료. 일본국립 야마구치대학 동아시아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정치・언론 박사( Ph.D.). 일본 식민지문화 학회, 일본 정치・경제사 학회 회원. 일본국립 도쿄 가쿠게이 대학을 경유하여, 현재는 중국 동북사범대학 인문학원 교수. 저서 및 번역서: ・일제의 조선지배에 있어서 정치 언론상호 관계(일본어 판: 2009년). ・일제의 조선통치와 언론(한국어 판: 2004년.  ・침략전쟁(한국어 번역: 범우사, 2006년)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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