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그림에 사로잡힌’ 한 영혼이 살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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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그림에 사로잡힌’ 한 영혼이 살고 있었네
  • 장수정 객원 기자
  • 승인 2007.08.16 15: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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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산에 또 하나의 명소가 들어섰다. 시립월전미술관이 지난 화요일(8월 14일) 개관식을 했다. 설봉산에는 세계도자센터, 시립박물관, 설봉서원에 이어 미술관까지 들어서고 보니 전통과 문화의 향기가 진하게 어리는 곳이 되었다. 시립월전미술관은 총사업비 53억 원을 들여 설봉공원 내 충효동산 맞은편 산자락에 지하 1층, 지상2층으로 전면이 유리창으로 뒤덮인 서양식 건물로 지었다. 월전미술문화재단으로부터 장우성화백의 유작과 소장품을 기증받아 개관전시로 ‘월전, 그 격조의 울림’전을 한다. 전국에 시립미술관이 몇 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서울, 부산, 대전, 광주에 이어 이천에도 시립미술관이 개관되어 미술품 감상은 물론  문화도시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까지 느끼게 되었다.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 화백은 충주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일가가 여주 흥천면 외사리로 이사를 한다. 어린 시절 한학 교육을 받았고, 18세에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문하에 들어가 한국화에 입문한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 입선으로 미술계에 등단하고,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선전에 4회 연속 특선을 한다. 여주에서 30년 살고 나머지 생은 서울에서 살았다. 1946년 해방 직후, 서울대 미대가 생기면서 교수생활을 시작한다. 후학을 양성하고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화가로서 1950년 제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내에서 9회, 해외초청 5회, 총 14회의 전시회를 갖는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도 재직했으며 월전이 길러낸 제자들은 지금 우리나라 화단의 원로들이 되었다.  1989년 사재를 털어 월전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한다.

1991년 월전미술관 한벽원(寒碧園)을 신축 개관하여 후학들 연구의 장으로 내놓고, 월전미술상을 제정하여 유망한 작가들에게 창작 의욕을 북돋아줬다. 80세가 넘어서도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나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자 자신의 작품과 일생동안 수집해온 소장품들을 사회에 환원하여 모든 사람들이 즐기기를 희망했다.


2005년 2월 28일, 월전이 세상을 뜨자 후손들은 고인의 뜻을 충실히 따른다. 현재 월전미술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장학구(월전의 셋째 아들)씨는 월전의 사재를 사회에 환원할 뜻을 세우고 모든 재산을 재단에 기부했다. 사립 월전미술관(서울 팔판동 소재)을 공익적 성격이 분명한 ‘이천시립월전미술관’으로 거듭 태어나게 했다. 평생 화가로서 미술작업과 교육자로서 미술교육에 전념하고 살아온 월전 장우성 화백은 이천 설봉산에서 편안하게 쉬게 되었다.

개관 전시회 ‘월전, 그 격조의 울림’
미술관 로비에 들어서면 월전의 흉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층으로 오르면 상설전시실이 세 개 있다. 제1, 2전시실에는 월전의 작품들이, 기획전시실에는 월전과 제자들의 작품이, 제3전시실에는 월전이 수집한 고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월전의 그림은 선이 단순하고 여백의 미를 살리고 있어 조선시대 문인화를 보는 듯하다. 그의 그림에는 회화와 일치되는 글씨(제시題詩)가 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드물게 시서화(詩書畵)를 겸비한 화가다.


인물화로는 1950년대 그린 ‘한국의 성모자상’이 이색적이다. 성모와 아기예수를 한국인으로 묘사했는데 간결하고 힘찬 선의 아름다운 격조가 유감없이 표현되었다. 흰 무명옷을 입은 여인의 정갈한 자태는 우리의 눈길과 마음을 오래 붙들어 놓는다. 영모화(새나 짐승을 그린 그림) 중에는 서록도(瑞鹿圖, 1973)가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화폭에 상서로운 사슴의 무리가 우아하며 고고하다. 1998년 그린 ‘가을밤의 기러기 소리’는 월전이 가장 아끼던 그림 중 하나이고, 1999년 자신의 일생을 ‘그림에 사로잡힌’이라는 뜻의 두 글자 ‘화노(畵奴)’로 써서 표현한 것은 진정 문인화의 백미라고 평단의 찬사를 받고 있다.


1981년 70회 생일을 맞은 축하연에서 월전은 자신의 예술적 목표를 요약해 말했다. “나는 동양적 수묵회화의 전통적 양식을 지키면서 동시에 나를 하나의 현대적 의미 속에서 현실적인 존재로 견지하기위해 노력해 왔다.” 월전의 고매한 작품들을 가까이에서 언제나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심미안을 높이는 좋은 기회가 된다.
개관 전시를 빛내는 소장품 전시도 하나하나 유심히 본다면 우리나라 고미술의 보물을 찾는 기분을 충분히 맛볼 것이다. 장승업의 화조도, 추사의 글씨, 오경석의 매화 등등. 아는 만큼 보일 터이니 그저 즐기면 된다.  

   
시립월전미술관 개관의 의미
월전미술관은 개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친일 시비와 미술관 건립 부실공사로 그동안 말이 많았다. 월전의 스승인 이당 김은호는 구한말 최후의 어진화가였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일본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그림을 그리는 등, 친일 활동을 했다. 1920년 후반부터 화실을 개방하고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한유동 등 후진을 길러낸다. 광복 후에는 국전 추천작가,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한다.
우리 민족이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다보니 광복이 됐어도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 사회 각계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늦게나마 민족문제연구소가 3090명 친일인사를 추려 명단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2005년 8월 1차 발표를 할 때, 미술계에서는 조각가 김경승, 인승 형제와 김은호, 김기창 등과 함께 장우성도 포함이 되었다. 월전 장우성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아무 말이 없다. 다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시시비비를 가려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시립월전미술관은 월전의 작품과 소장품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고인을 기리는 미술관의 성격을 갖고 있다. 월전의 친일시비는 시립미술관으로 거듭날 때 민감한 문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시립월전미술관은 개관을 했고 월전의 작품을 상시 전시하여 우리 국민과 세계인에게 월전의 예술세계를 언제나 접할 수 있게 하겠다고한다. 다양한 전시기획으로 미술문화를 선양하고 지역문화의 촉매 역할을 자처한다. 월전이 희망했던 대로 공익적인 미술관이 되길 기대해 본다. 


시립월전미술관 관장 장학구 씨는 “고미술 소장품 전시를 통해 유물의 소중함과 가치를 인식하는 문화교육에 힘쓰고, 문화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여 평생교육기관으로 미술관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말한다. 


   
미술관 뒤에 있는 월전기념관은 선생 생전의 마지막 작업실을 원형에 가깝게 재현해 놓았다. 유리창을 통하여 들여다본 작업실은 정갈하고 품위가 있어 보인다. 물감을 개던 그릇들은 도자기가 대부분이고 즐겨보던 책들이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있다. 음악을 들으며 작업을 했을까? 오디오가 보인다. 벽에는 월전의 사진들이 걸려있다. 마당도 잘 꾸며 놓았다. 기념관 앞뜰에는 노대가를 상징하는 조각공원을 조성했다. 월전화사 78세 상(月田畵師七十八歲像)을 흉상으로 안치했고 화비로는 ‘가을밤의 기러기 소리’, 서비로는 ‘화노’를 새겼다. 전시실에서 보던 그림을 비석에 새겨놓은 것은 월전기념관을 둘러보는 재미중에 하나다. 설봉산에 가면 갈 곳이 하나 더 생겼다. 그곳에 가면 월전 장우성 화백의 예술세계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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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2007-08-27 13:42:12
이 작자 완전 친일파인데......
이걸 쓰다니.
기자도 친일파 후손인가.
빌어먹을 이천시.........이런놈을 위해 미술관을 지어 주다니....
꼴통 이천시장?......이러니 이천이 이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