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상상은 어떤 관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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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상상은 어떤 관계일까?
  • 최준서의 발목잡는 공부 날개달기
  • 승인 2007.08.1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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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면, 탐구보고서 숙제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탐구보고서는 과학, 사회, 역사, 언어, 예술 등의 영역에 걸쳐, 교과와 관련한 혹은 평소 관심이 있던 일을 연구하여 결과를 정리한 것입니다. 요즘에는 초·중·고 학생들의 탐구·연구보고 대회 등이 많이 개최되고 있고,  이런 대회의 수상경력을 대학 입시 전형의 한 요건으로 사용하는 대학들도 있습니다. 탐구보고서 작성의 기본 방법은 대학논문이나 전문연구자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기본 방법‘학적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과학’, ‘과학적 방법’이란 무엇일까요?


과학적 방법으로 뭔가를 탐구하려면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노력과 습관이 필요합니다. 과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만났을 때, ‘관찰’과 그 관찰로부터 도출된 ‘합리적 설명’을 생각의 기초로 삼는 것입니다. 즉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는 목적은 뭔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는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①관찰 → ②가설 → ③실험 → ④이론 → ⑤예측
과학적 방법에는 인간이 가지고 두 가지 커다란 능력이 숨어 있습니다. 귀납과 연역입니다. 관찰에서 이론에 이르는 단계는 오감을 이용하여 경험한 것을 토대로 새로운 설명 방법, 이론을 만들어 내는 과정입니다. 이런 방법을 귀납적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론으로 다른 것을 예측하고 설명하는 것을 연역적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학적 방법’의 테크닉을 달달 외우고, 귀납과 연역의 과정을 반복해서 공부하면 영어단어 외워지듯 ‘과학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항상 정확하고 틀림없고 예측 가능하고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때로 전혀 비과학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철수의 탐구보고서를 요약해 보았습니다.


어느 날, 철수는 동네 뒷산에 놀러 갔다가 이상하게 생긴 구덩이를 발견했다. 그 구덩이가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궁금한 철수는 여러 가지 도구(돋보기, 망치, 카메라...)를 이용하여 구덩이를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관찰기록을 꼼꼼히 살펴보고 나서 철수는 그 구덩이는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이 부딪쳐서 만들어 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철수는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인지 확인해 보려고, 집 앞마당에서 실험을 했다. 모래가 가득 담긴 상자에 장난감 총을 쏘아 구덩이를 만들어 보았다. 장난감 총의 거리를 여러 가지로 바꾸어 가며 실험도 해보고, 모래 대신 찰흙이나 돌을 놓고 같은 실험을 여러 차례 해 보았다. 그 결과 뒷산 구덩이와 아주 유사한 구덩이를 만들 수 있었다.

철수는 자신이 처음에 한 생각, 뒷산 구덩이는 외계에서 날아온 운석이 만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뒷산 구덩이의 정체를 자신 있게 폭로했다.
철수가 한 행위는 과학적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철수는 정확하게 과학적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관찰하고 가설을 세워서 실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영희는 아무래도 철수의 주장이 별로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네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무조건 철수가 틀렸다고 비난하면 될까요? 영희가 철수의 주장을 과학적으로 비판하려면, ‘과학적 방법’으로 만든 다른 설명으로 철수를 공격해야 합니다. 자, 그럼 영희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과학의 8할은 관찰과 가설 세우기
우선, 구덩이를 발견하고 관찰하는 데까지는 철수와 비슷합니다. 영희가 철수와 다른 과학적 설명을 만드는 출발점은 다음 단계, ‘가설’을 세우는 단계입니다. 영희는 그 문제의 구덩이가 외계운석의 소행이 아니라, 비가 많이 와서 나무가 뽑혀 나간 자리라고 가설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철수와는 다른 형태의 실험을 하고 새로운 이론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과학하는 힘’의 8할은 관찰과 가설 세우기입니다. 새로운 것을 ‘새롭게’ 보고 호기심을 갖지 않으면 과학은 없습니다. 그 새로운 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과학은 없습니다. 관찰은 ‘질문하기’이고, 가설은 ‘상상하기’입니다. 그런데 질문과 상상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무엇을 질문하건, 어떻게 상상하건 그것은 자유입니다. 과학적으로 질문하고 과학적으로 상상하는 법 같은 것은 없습니다. 과학은 자유롭게 질문하고 상상한 것을 실험하고 검증하고 밝히는 ‘방법’일 뿐입니다. 물론 이미 밝혀진 과학적 설명을 토대로 새로운 질문과 상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질문하고 상상하는 행위 자체는 과학 너머의 영역입니다.


‘우주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기독교에서 ‘우주는 하나님이 칠일 만에 창조하신 것’이라고 설명하고, 고대 인도인들은 ‘커다란 거북과 코끼리가 떠받치고 있는 세계’라고 설명하고, 아인슈타인은 ‘구면처럼 닫혀 있고 끝이 없으며 팽창도 수축도 없다’라고 설명하고, 스티븐 호킹은 ‘태초의 빅뱅이후 계속 팽창하고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우주에 대한 여러 설명은 모두 하나의 질문에 대한 여러 상상입니다. 이 상상을 과학적 방법(관측, 실험, 검증)을 통해 설명을 만들어내면 우리는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르고 그렇지 않으면 ‘신화’라고 부릅니다.

과학은 ‘이성’, 신화는 ‘감성과 낭만’의 산물
물론 과학이 옳고 신화는 그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은 ‘이성’이 작동한 산물이고 신화는 ‘감성과 낭만’이 작동한 산물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문명은 이성과 감성이 동시에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감성보다는 이성의 힘이 좀 더 과장되어 보입니다. 신화보다는 과학이 우월한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불과 수백 년 전에는 지금과는 정확히 반대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는 과학적인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당시 교회로부터 곤혹을 치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명하던 중세 유럽에서는 ‘과학적’ 설명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기가 지나고 과학은 크게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거꾸로 과학이 비과학을 탄압했습니다. 18~19세기의 유럽의 시인과 소설가들은 자신의 감정이 지나치게 드러나는 표현이나 심지어 도치법, 반어법 같은 표현을 쓰면 3류 작가로 치부되었습니다. 문학에서도 수학적인 깔끔함, 정확성, 정밀함을 요구했습니다. 지금 보면 참 어리석어 보이지만 당시 문학가들은 아주 심각했습니다. 영국의 시인 키츠는, 시인의 목을 베었다는 이유로 데카르트와 뉴턴을 비난하였고, 시인 블레이크도 그들을 저주했습니다. 시인들은 친구들과 술잔을 들 때마다 ‘수학의 혼란을 위하여’라고 외쳤습니다. 과학이 이성의 이름으로 감성을 괴롭힌 시대였지요.


이성과 감성은 모두 상상을 먹고 삽니다. 상상이 하늘에 비행기를 띄우고, 상상이 달에 토기를 키웁니다. 그나저나 여러분은, 철수와 영희의 과학적 논란의 대상이 된 구덩이를 보고  어떤 상상을 하시렵니까?
“그 구덩이는 별똥별이 흘린 눈물자국이야!”...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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