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 차나 한잔
상태바
데스크 칼럼 / 차나 한잔
  • 이천저널
  • 승인 2006.10.26 13: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인을 따지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르다

1997년, 일본 고베에서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연쇄 살인을 한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를 떠들썩하게 할 만큼 사회적 파장이 커 결국 소년법의 개정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이 사건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본 사회의 반응이다.

이런 어린 학생들에 의한 범죄가 일어나면 일본인들은 으레 ‘부모의 책임’을 들먹인다. 사건을 일으킨 부모는 매스 미디어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몇 번이나 사죄 요구를 받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한다. 1972년, 나가노 현에서 대량 살상과 인질 농성 사건을 벌인 한 적군파 대원의 아버지는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다 목을 매 자살을 한 일도 있다. 

고베 연쇄 살인 사건을 일으킨 중학생이나 적군파 대원들은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이 있을지 모르지만 부모에게는 도대체 무슨 책임이 있는 걸까?

일본의 저명한 문학 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은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코멘트를 하는 심리학자나 교육학자, 사회학자들의 성급한 단정에 대해 비판한다. 그들은 사건의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말을 하는데 그 경우 부모의 책임으로 귀결시키는 듯한 말을 자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객관적으로 원인을 찾고자했던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가정 환경을 들먹여 ‘책임’과 혼동하게 만들고, 또 신문 기사는 이를 되받아 사건의 원인을 말하지 않고 부모의 책임이라고 받아들여지는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원인을 추적해 가면 부모, 학교, 환경, 현대 사회라는 식으로 소급하게 된다. 그 결과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의 책임은 묻지 않게 된다. 그러면 성급하게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원인이야 어떻든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 결과 여러 원인에 대한 해명은 잊혀지고 만다. 그러나 원인을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문제다. 원인은 철저하게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당사자의 책임 문제와는 구별해야 한다.”

지난 달 말에 이천의 한 중학교 학생이 사설 학원의 빈 강의실에서 다른 두 학생의 손찌검을 받고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을 일임에는 틀림없다. 경찰은 1차 조사 결과 그 두 학생의 폭력이 있었음을 확인했지만, 그것이 한 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직접적인 사인은 아니라고 밝혔다. 유족측은 곧 정밀 부검을 요구했고, 그러면서 이 사건은 유족과 학교, 가해 용의자 그리고 그 날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여러 학생들의 부모들은 이 사건의 ‘원인’과 ‘책임’을 둘러싼 논쟁에 휘말렸다. 언론은 ‘학교 폭력’이니 ‘폭력 써클’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며 죽음의 원인을 예단했다. 그리고 이런 논란 속에 항의의 표시로 유족측은 죽은 학생의 유골을 여러 날 째 학교 교장실에 안치해 놓고 있다.   

 이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 사회 역시 예로 든 일본의 경우와 다르지 않음을 실감한다. 부디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슬기로운 해결책이 찾아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린 학생의 안전조차 지켜내지 못한 우리 사회를 대신해 유족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

이천저널
이천저널
webmaster@icjn.co.kr
다른기사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