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리 옛날 이발관에 갔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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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리 옛날 이발관에 갔었네
  • 이석미 기자
  • 승인 2006.09.22 1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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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수입 쌀 40가마의 일터가 지금은 동네 사랑방으로”

   
이제는 흑백영화 화면에서나 보게 된 오래전 이발소가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설성면 수산리 도로 옆에 낮게 자리잡고 있다. 이름하여 수산이발관.

이곳에서 33년째 이발관을 경영하고 있다는 김사필(63)씨를 만났다.

“올해로 45년째에요. 모가면 원두리에서 나서 서울 등지로 떠돌다 74년에 귀향해서 그때부터 죽 이짓을 하고 있지요. 70년대에는 농촌에 인구도 많고, 교통편이 없으니 주변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지만 지금은 거의 미용실을 이용해 용돈벌이 정도밖에 안되지요”

이제는 이발관이 주업이라기보다는 가끔 찾아주는 단골손님을 위한 사랑방 정도의 역할을 하지만 작은 농사채로 두 부부 살아가는데 아무 불편함이 없다고 말하는 김씨의 얼굴엔 지난 세월의 흔적이 여유롭게 묻어난다.

“예전엔 이발해주고 돈 대신 쌀로 받았어요. 일년 내내 이발한 비용을 추수할 때 한명 당 쌀 한말로 쳐서 받으니 1년 수입이 40가마정도 되었지요. 예전엔 촌에 논농사밖에 없었으니 가을 추수 때 수확하는 게 전부였지요. 점차 특수작물도 하고, 취업들도 해서 현금을 받기 시작한 게 90년부터였을 겁니다”

아직도 겨울이면 연탄난로를 피운다는 낡은 이발관의 이용 의자와 세면대에서도, 오랜 기간 돈 대신 쌀을 받았다는 김씨의 여유로운 마음 씀씀이가 그대로 베어있는 듯 했다.
요즘은 간혹 도로를 지나다 허름한 간판을 보고 신기함에, 또는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향수에 끌려 차를 세우고 이발관을 찾은 손님들이 ‘이런 이발관이 아직도 있어 너무 좋다’, ‘머리가 마음에 든다. 꼭 다시 오겠다’고 말할 때 작은 보람을 느낀다고.

부인 김상주(59)씨와 슬하에 딸만 셋을 두었다는 김씨는 인터뷰 중, 둘째 딸에게서 걸려온 안부전화에 “요즘은 딸이 최고야”라고 엄지손가락을 꼽으며 효녀 딸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오랜 기간 간경화를 앓아온 부인이 요즘은 관절까지 나빠져 걱정이지만 잘 자라준 세 딸들을 보면 아무 걱정이 없다고 웃는 김사필 씨.

“예전에 찾아주던 지역주민들도 지금은 거의 돌아가시고 없어요. 그래서 단골손님도 줄었지만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발관은 계속 해야지요”

욕심 없이 살아가는 촌부의 넉넉한 미소로 배웅을 받으며 돌아오는 길, 쌀쌀한 가을바람에도 훈훈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수산이발관이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아있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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