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가해자 인식 전환
상태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가해자 인식 전환
  • 박인식(전 대학교수/ 일본학술박사)
  • 승인 2016.01.08 14: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 피해자에서 가해자 인식으로 전환
▲ 박인식(전 대학교수/ 일본학술박사)
일본에서 교과서 문제가 본격적으로 붉어져 나온 것은 1982년 6월 26일자 각 조간신문에 일본국내의 교과용 도서검정에 있어서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지츠교(実教)출판사의 『세계사』에서 중국허베이에의 침략(華北への侵略)에서 「침략」이라는 단어가 교과서 검정과정에서 「진출」로 바뀌었다.라고 보도했다. 이 보도의 발단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심각한 외교문제로까지 발전한 일이 있었다. 이 교과서 문제는 일본인의 전쟁인식에 큰 변화를 준 계기가 되었다.

1982년까지 일본인의 전쟁인식은 「피해」라는 인식이었다. 이 같은 피해의식은 전형적으로 원폭 문제와 도쿄(東京)공습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미국이 히로시마(広島)·나가사키(長崎)에 원폭을 투하했다는 것은 일본인에게는 피해자로서 인식이 되어 오다가, 일본의 대외 침략전쟁의 결과로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식이 전환됨으로써, 일본인이 전쟁의 비참함을 아는 동시에 세계의 평화를 어필하는 것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서 노 모어 히로시마(No More Hiroshima), 노 모어 나가사키(No More Nagasaki)라는 형태로 일본인 중에서는 원폭 피해, 원폭의 비참함을 통해서 전쟁의 비판적 정신을 고양시키는 교육이 행해지게 된 것이다.

또 하나 계기는 도쿄공습이다. 도쿄공습에 대해서도 일본인의 인식은 모두 「피해」 및 「피해자」라는 의식이었다. 그런데 1982년 위의 교과서에서 「침략」에서 「진출」로 바뀌는 개념이 「일본은 타국을 침략해 피침략국에 피해를 준 것이다」라는 사실이 일본인에 의해 자행된 전쟁은 침략전쟁이었다는 의식을 강렬하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서 일본인에게 전쟁이라고 하면, 원폭이나 도쿄공습만이 아니고 한국을 비롯한 중국·동남 아시아의 침략이라고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주도하는 2001년 교과용 도서검정에 합격한 후소샤(扶桑社)의 『새로운 역사교과서』 (新しい歴史教科書)는 중학교 사회과 역사교과서로서 「새역모」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의해 집필되었다. 이 교과서는 극우자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가신 17명에 의해 검정을 신청한 책으로 「종군 위안부」, 「산코작전(三光作戦)」, 「731부대」 등의 언급이 격감한 교과서였다.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와 중국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는 사실을 강하게 비판했던 가해자의 기술은 후퇴시켜 놓았다. 이로 인하여 「새역모」 이들만의 독자적인 역사관이 왜곡 기술되어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고, 당시의 교과서 채택 비율은 아주 낮았다. (2001년의 추계로 0.097%). 한국의 교학사 역사교과서 채택율과 비슷하였다.

또한 2011년 오키나와(沖縄)현 야에야마(八重山)지구 (이시가키(石垣)시 , 요나구니(与那国)町, 다케토미(竹富)町)에서는 문부 과학성이 2002 년 8 월에 낸 통지 "교과서 제도개선에 대하여"에 근거로 한 교과서 개혁실시에 대해서 「새역모」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계열로 불리는 지유샤(自由社)·이쿠호샤(育鵬社)의 중학교 역사·공민 교과서 채택 반대를 주장하는 세력이 「새역모」 계열 교과서 채택을 위한 개혁이라고 주장했다. 문부성 개혁에 대한 네가티브 캠페인으로 교과서 채택을 둘러싼 소동으로 발전한 일이 있다.

당초 이 소동은 역사 교과서의 문제를 중심으로 두고 있었지만, 요나구니(与那国) 섬에 자위대 배치를 반대하는 세력도 이쿠호샤(育鵬社)의 공민 교과서의 채택에 대한 네가티브 캠페인에 가세하므로써 자위대 배치 반대의 성격도 띠게 되었다. 이곳에 자위대 배치는 전쟁을 할 수 있는 현장이 될 수 있다는 주민들의 과거 전쟁에서 교훈을 얻은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오키나와(沖縄)는 태평양전쟁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 중 하나로 1945년 4월 미군이 합동 상륙작전을 감행했고, 일본군은 이에 대해 강력한 방어전을 벌여 3개월 동안 일본군은 10만 명 이상이 전사했다.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으나 광범한 미군시설은 현재까지도 작전용으로 남아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오늘날까지도 전쟁의 악몽으로 시달리고 있으며 미군기지 이전을 강력히 요구하는 지역이다. 일본 정부의 역사 교과서 검인정 과정에서 침략을 진출로 미화시키려던 치졸한 행위는 많은 일본의 지식인과 주민들에게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의 침략전쟁을 피해자 의식 미화에서 가해자로서 역사인식이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박인식 소개
이천시 출생.
일본학술박사.
KCJ국제관계연구소 소장
현재 명성황후의 시해 일본내각개입 연구중
중앙대학 대학원(신문방송) 언론학 석사
일본국립 야마구치대학 동아시아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일본 도쿄가쿠게이대학을 걸쳐 동북사범대학, 창춘이공대학 교수역임.
저서: 일제의 조선통치와 언론
일제의 조선지배에 있어서 정치・언론 상호 관계
침략전쟁(번역서) 등 다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