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조선총독부 자료의 신문허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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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조선총독부 자료의 신문허가 기록
  • 이천뉴스
  • 승인 2011.03.1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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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일제 식민지시대에 동아일보(東亜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시사신문(時事新聞)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허가를 받아 당시 식민지 조선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민간지였다.
시사신문은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손  선수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 말소 보도사건으로 자진 폐간되었지만, 동아일보(東亜日報)나 조선일보(朝鮮日報)는 오늘날까지 급성장을 거듭하여 한국의 대표 언론기관이 되었다.

그래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식민지시대의 신문경영과 논조, 그밖에 중요한 필화사건이나 비화에 관해서 사료를 분석하여 게재한다. 특히, 일제 식민지하에서 언론활동과 한민족에게 끼친 영향, 민중과 신문관계 등에 대해서 연재하고자 한다.

여기에 연재된 모든 내용에 관한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에게 있음을 밝혀두고, 기술된 내용의 입증사료나 참고문헌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본문 중에 삽입해 독자들에게 쉽게 이해하도록 하였다.

1회에서 7회 연재까지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의 조선총독부 허가배경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8회 게재분 부터는 식민지 전 기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행적에 관해서 연재한다.

 

일제시대의 신문 발행은 한국언론사에서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시사신문 중심으로 허가일을 바로 잡고자 한다.

총독부 경무국이1919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의 중요사건을 모아서, 치안업무용으로 사용한 극비문서인 『고등경찰관계연표』(高等警察関係年表)에서는 “다이쇼 8년 12월 4일 시사신문 허가, 민원식의 주재하는 협성구락부를 국민협회로 바꿔 그 기관지로써 본지 발행을 계획 허가함”이라고『조선에 있어서 신시정』의 사료보다도 구체적으로 12월 4일로 적고 있다.

또한 “다이쇼 9년 1월 6일, 조선일보 발행허가, 내선인 융화를 목적으로서 다이쇼5(1916) 년11월 25일 고(故) 조중응(趙重應) 등의 주창으로 조직되어진 대정친목회의 기관지로서 동 일보 발행을 기획, 허가되었으나 동회가 점차 배일성향 및 재정의 궁핍때문에 다이쇼 12(1923)년 7월에는 동 신문의 소지 주식 800주를 3,000엔으로 송병준에게 매각한다. 동아일보 발행허가, 사장 김성수(金性洙), 편집인 장덕수(張徳秀), 발행인 이상협(李相協)의 언문신문(민족계) 발간(현존)”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총독부 발행 잡지인 『조선휘보』(朝鮮彙報)에서는 「신문지 발행허가 조사」제목의 기사에서는 “다이쇼8 년 12월 4일 동아일보, 다이쇼 9년 1월 5일에는 조선일보와 시사신문을 발행인가”를 보도하고 있다. 여기서는 동아일보를 민간 신문 최초로 1919년 12월 4일에 허가를 해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허가일이 1919년 12월 4일이라고 확실히 입증할 만한 다른 자료로는 현재까지 발견 된 것이 없다.
『자작 사이토전』에서도 총독부 경무국 발행의 『고등경찰연표』에서 인용해 “1919년 12월 4일, 시사신문 허가, 1920년 1월 6일 조선일보 발행허가와 동아일보의 발행허가”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협회사 제1』(国民協会史第1)에서는 “다이쇼9년 1월 6일자로 지령 제1호에 의해 시사신문 발행건이 조선총독으로부터 허가되어 졌으므로 즉시 창간의 준비에 착수하다”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시사신문의 발행주체는 처음 협성구락부로 허가신청서를 제출했었다.

또한 총독부 경무국 발행의 극비문서 『조선에 있어서 출판물 개요』(朝鮮於ける出版物概要)에서는 “다이쇼 9년 1월 6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인가”(24)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25년사』(朝鮮総督府25年史)와 『조선총독부 30년사』(朝鮮総督府30年史)에서는 동일한 내용으로 “다이쇼8년 12월부터 동 9년에 걸쳐 경성에 있어서 조선인이 경영하는 언문사용의 시사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발간을 허가하고”라고 기록되어진 것으로 보아서 1919년 12월에 이미 3개 민간지 중, 일부가 이미 허가가 된 것으로 침작할 수 있겠다.

위와 같이 총독부 자료에서는 1919년 12월부터와 12월 4일 허가일로 명시된 문헌과 1920년 1월 6일자 허가일로 되어 있는 문헌 등, 크게 두 종류의 자료로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신문 담당부서인 총독부 경무과에서 신문허가를 둘러 싼 고심한 흔적을 엿 볼 수 있는 문헌들이기도 하여 이에 대한 원인과 배경이 달리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필자 소개: 박 인식

▲ 박인식 교수
이천시 출생. 이천중・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언론학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 버릿츠 수료. 일본국립 야마구치대학 동아시아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정치・언론 박사( Ph.D.). 일본 식민지문화 학회, 일본 정치・경제사 학회 회원. 일본국립 도쿄 가쿠게이 대학을 경유하여, 현재는 중국 동북사범대학 인문학원 교수.

저서 및 번역서: ・일제의 조선지배에 있어서 정치 언론상호 관계(일본어 판: 2009년).
・일제의 조선통치와 언론(한국어 판: 2004년. 
・침략전쟁(한국어 번역: 범우사, 2006년)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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