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확인은 ‘고통’
상태바
존재의 확인은 ‘고통’
  • 이천뉴스
  • 승인 2008.08.21 15: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통이 심할수록 존재가 선명해져
미국영화 ‘GI 제인’에 데미무어가 최악의 조건에서 행해지는 훈련과정에서 훈련관이 “이제 포기하라”고 빈정거리듯 종용 한다. 대답은 “NO”. 이어지는 혼잣소리가 명대사라고 생각 한다. “고통이 심할수록 나의 존재가 선명해 진다.”

유명작가나 시인 또는 운동선수들도 “지금 내가 있게 된 것은 고통이었다”고 성공담이나 존재감을 말할 때 ‘고통의 고마움’을 토로한다. 고통을 싫어하면서도 떨쳐 버릴 수 없는 그 끈질긴 관련성은 과연 무엇일까? 내 몸을 지탱하는 지구력이나 근력이나 숨쉬기나 충격을 가했을 때 오는 육체적인 고통과, 자존심을 건드리는 고통, 원하는 대로 구해지지 않는 고통,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린 상실의 고통 등 정신적인 고통이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고통에서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통을 싫어하면서도 그 고통 속에 사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그렇다면 고통에서 멀어지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도 영특한 인간의 발상이고 소망이었다. 불교에서는 중생들이 사는 세계를 ‘사바세계, 감인세계’라고 부른다. 이 세계의 중생들은 10악을 참고 견디며, 또 이 국토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자연히 중생들 사이에서 참고 견디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아주 태생적으로 그렇게 태어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사바세계 밖의 세상을 모르면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생활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비타협의 외곬으로 흘러 굳어져 있는 세상이다.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이 있다. 천인이 보는 물은 보석으로 빛나는 땅으로 보이며, 사람들은 물로 보고, 물고기는 자기들의 집이라고 보며, 아귀는 농혈(피고름)로 본다는, 자기들 세계에서 보는 견해이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 식도 마찬가지다.

발을 만져본 장님은 큰 기둥으로, 귀를 만져본 장님은 큰 부채로, 몸통을 만져본 장님은 집채만한 바위로, 코를 만져본 장님은 거대한 대롱이 코끼리라고 우기는 것과 같이 모두 일부분만 가지고 마치 전체를 아는 양 떠들고 우기고 윽박지르는 형국이다. 이런 흐름이 진리로 고질화된 것을 ‘일상의 진리’라고 한다. 우리들이 도토리 키재기로 치고받고 하는 그런 진리이다.

‘부처’라는 말은 깨우쳤다는 말이다. 부처는 이런 일상의 진리가 잘못된 것을 스스로 깨우친 분이시다. 욕망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일상의 진리 밖에 있는 ‘궁극의 진리’, 편협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를 아우르는 중도의 진리, 일체가 변하고 흘러 실체가 없으나 변화 속에 생성 소멸하는 것이 현실의 삶이라는 진리, 그러므로 고정된 법은 없고 고정된 이름도 없으나 편의상 이름을 붙여 의사소통하는 가명(이름뿐인 이름)이라는 진리, 이런 등등의 진리를 설명한 것이 금강경을 포함한 모든 경전들의 이름이고 내용이다.

고통 속에서 살지만(일상의 진리)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궁극의 진리)는 메시지를 제시함으로써 고통 속에 살면서도 희망과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일는 기회와, 무한한 가능성을 알려 주는 부처님의 말씀들이다. 일상의 진리와 궁극의 진리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긍정적이고 넓은 시야로 수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도 크다. 우리들의 수행정도와 수행으로 얻어진 경지의 spectrum(영역·범위)이 다양하고 무한하다. 그 범위의 간극은 각자가 하는 마음의 수행정도로 나타날 것이다. 일상의 진리에서 궁극의 진리를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지 않을까?
이천뉴스
이천뉴스
news@2000news.co.kr
다른기사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