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7일(일) 「이천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 주관한 이수흥의사 순국 93주기 추모식이 이수흥 의사 동상 앞(이천시 창전동 이천초등학교 앞)에서 거행되었다.
이 행사에는 엄태준 이천시장을 비롯하여 이천에 거주하는 독립투사 유족 등 내외 빈 약 50여명이 참여하였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이천독립운동기념사업회 최의광 회장은 인삿말에서 “코로나 방역 등 어려운 가운데 참여해 주신 유족 및 내외 빈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이수흥의사는 이천출신 독립투사로서 시종일관 추호도 변절이 없었던 훌륭한 분”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어 축사에 나선 엄태준 시장은 “어려운 가운데에도 추모식에 참여해 주신 이천의 독립투사 유족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앞으로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이천의 독립운동 선양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이수흥 의사의 후배가 되는 현 이천초등학교 6학년 표서진·원태경 두 학생이 꽃다발을 동상 앞에 드리는 헌화 모습은 본 행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으로 많은 분들이 ‘잘 한일’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헌화 후 두 학생 모두 ‘이수흥 의사가 이렇게 훌륭한 분이신 줄 몰랐다며 자신들도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수흥 의사 증손자 뻘 되는 이정윤씨 또한 “이 추모식을 마련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며 인삿말을 전했다.
이번 행사는 안송란(안병극 독립투사 친딸)씨의 만세 3창을 마지막 순서로 행사를 종료했다.
『이천시지(2001)』에 따르면, 이수흥 의사(1905~1929)는 이천 창전동 출신으로 이천공립보통학교(현 이천초등학교)를 2년 여 다녔으며, 17세 되던 해인 1922년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특히 김좌진 장군의 ‘신명학교’에서도 수학했으며, 이후, 임시정부 직할 「육군주만 참의부」에 몸담으면서 ‘특무정사’라는 직무를 맡아 활동하다 1926년 5월경 군자금 모금 차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약 5개월 활동하다 11월 체포되었는데 3년 여의 취조 및 예심과정을 거쳐 1928년 7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으며 이듬해 1929년 2월 27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당시 일제 재판부가 의사에게 사형언도 후 상소 여부를 묻자, “일제에(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며 상소를 포기하였으며 끝까지 의연한 모습으로 순국하셨다 한다. 일제 한국지배가 시작된 이후 그들이 운영하던 법원에서 사형선고 후 상소를 하지 않는 사람은 허위, 강우규, 이수흥 세 분 뿐이었다고 한다. 서울 현충원에 의사의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