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우의 왈가왈부, 꼬리치는 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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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우의 왈가왈부, 꼬리치는 논술
  • 박정우
  • 승인 2007.05.18 16: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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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의 탄생

철도는 승객의 여행 수단으로 등장한 게 아니라
산업혁명에 필요한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봄 구경이 시원찮았는데 벌써부터 목덜미에 땀이 흐르면 어쩌자는 거야?”

“설마 지금 내 걱정을 해주는 건 아니지?”

“새삼스럽게 걱정은 다 뭐야. 봄이 지나가버린 마당에 걱정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그러니까 내 말은, 여름도 흔적 없이 지나가겠다, 뭐 그런 뜻이지.”

“알기는 혼자 다 아는군. 벌써부터 여행이라도 가고 싶어 안달 아닌가?”

“아, 여행이라니 무슨 소리야. 여름에도 역시 ‘공부질’에 파묻혀야지.”

“혼자 그렇게 요란을 떨어도 체신이 안 서. 사실을 말하자면 기차 여행이라도 하면 오죽 좋을까 싶지?”

“요즘 세상에 기차가 어딨나. 증기로 가는 차가 기차야. 그러니 열차라 불러야 옳을 걸.”

“어쨌든 최남선 선생이 경부 철도가를 읊은 지 올 해로 꼬박 99년째로군 그래.”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 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하는 철도 예찬 말이지?”

“그보다 35년 전에는 영국의 한 신사가 기차로 세계 일주를 떠났다지? 1873년에 말이야.”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 말이로군. 재산 절반을 내기로 걸고 철도 여행을 떠났다지?”

“주변에선 다들 100일은 걸린다고 주장했잖아? 명색이 2만 파운드를 건 내기라면서 어떻게 서로 20일씩이나 차이가 나는 계산법을 동원한 거야?”

“전 세계 기차역에서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을 정확히 지키면 80일에 가능하다는 거였어.”

“고생 많았겠네. 재산까지 걸고 말이야.”

“어려움이야 다 극복했지. 주인공이니까.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81일째였어.”

“고생은 실컷하고 내기에는 졌나?”

“날짜변경선을 넘었기 때문에 하루를 뺄 수 있었어. 재산을 지킨 거지. 내기에 이겼다고.”

“이기나마나 왜들 그런 복잡한 내기를 걸고 난리들이었어? 컴퓨터도 없고 하니 퍽 심심했나?”

“그 소설이 나올 무렵에는 철도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대단히 중요한 화제였거든. 요즘 사람들이 노트북 용량이나 인터넷 통신 속도에 큰 관심을 기울인 것처럼.”

“하기야 얼마나 놀랬겠어. 거대한 쇳덩어리가 김을 뿜어내면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데. 소리는 또 얼마나 컸겠나. 한 마디로 경악이었겠네.”

“철도가 처음 등장한 건 영국이지? 영국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했나?”

“처음부터 승객의 여행 수단으로 등장한 건 아니야. 산업혁명에 필요한 에너지, 즉 석탄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해서였어.”

“18세기 영국에서는 가축을 이용한 동력보다 석탄을 이용한 동력이 더 쌌기 때문이지?”

“영국은 프랑스보다 석탄 매장량이 많은 나라여서 증기기관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으니까.”

“기차 선로가 마차로 달리던 도로를 대체했으니 사람들의 생활방식에도 큰 변화가 생겼겠네.”

“장소 이동의 편리함을 준 것만이 아니지. 풍경과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지각 방식을 바꾸어 버렸으니까. 근대적 지각방식의 탄생인 셈이지.”

“하긴 나는 지금도 버스 창가에 앉아서 풍경이 멀어지는 것만 봐도 신기해.”

“그때까지 사람들이 지각했던 공간과 시간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관계를 이뤘는데, 철도 탄생과 함께 두 관계가 추상적이고 방향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게 됐지.(쉬벨부쉬, <철도 여행의 역사>)”

“추상적인 사유의 확장과 심화가 철도의 탄생과 더불어서 가속화되었다?”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이제 우리의 직관 방식과 우리의 표상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임에 틀림었다’고 말했어.”

“무슨 뜻이지?”

“철도가 역과 역 사이의 공간을 불필요한 장애로 보도록 만들었다는 거야. 우리의 지각 방식을 더욱 추상화시켰다는 의미라고.”

“도보나 마차로 여행하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온몸으로 대지를 느꼈을 테니까, 그렇겠네.”

“열차는 여행의 과정을 무시하고 목적지만을 중시하지.”

“현대 사회에 만연하는 속도 숭배의 한 양상이기도 하네.”

“시간을 재촉하는 가운데 떠밀려가는 승객들에게 바깥 풍경은 무의미한 거지. 감상할 대상이 아닌 거야. 결국 시간이 공간을 파괴했다는 거지.”

“철도가 등장하기 이전 시대에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이 개별적, 구체적이었다는 말은, 공간마다 시간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는 뜻이군.”

“철도와 함께 시간이 획일화되고, 따라서 공간도 파괴되고,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곤 표준화된 시간 속의 표준화된 인식밖에 없다는 말이겠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모두 똑같은 풍경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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