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우의 왈가왈부, 꼬리치는 논술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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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우의 왈가왈부, 꼬리치는 논술 <16>
  • 이천저널
  • 승인 2007.03.29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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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를 논하다

“돼지는 29℃가 넘으면 어디서나 배설하지.”
“더워지면 더러워진다?”

수리 논술을 독학할 시각이 되면, 논술이는 이런 식으로 딴청을 부린다.

“육류 섭취 좋아하지? 고기 말이야. ‘고기’라는 말, 이쁘게 들리나?”
“뭐야, 지금......”
“별 다른 뜻은 없어.”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논술이?”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런 거지. 쇠고기 한 근과 돼지고기 한 근하고 어느 고기가 더 무겁다고 생각해? 물론 이쁘기야 양쪽 모두지만.”
“한 근은 6백 그램, 그러니 양쪽 모두 평등한 무거움을 갖고 있겠지.”
“평등한 무거움은 또 뭐야. 웃기고 있네. 어느 한 쪽이 무겁다고 잘라 말해야 어느 한 쪽 고기가 더 맛있다는 의사 표시로 충분한 게 아닌가?”

“무게는 맛과는 상관이 없으니까. 논술이는 소고기와 돼지고기는 어느 쪽이 더 맛있지?”
“그런 건 알아서 뭐하시게? 돼지고기 먹어본 지 너무 오래 됐다는 생각은 안 해?”
“공부하느라 바쁜 탓이었을까?”
“어째서 요즘 내게 통 돼지고기를 안 사주느냐고? 종교적인 이유야? 개종이라도 한 거냐고? 아니면 우리 집 경제 사정인가?”

“음식을 문화라고 부르지? 문화는 지역 환경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인 갈등, 경제적인 합리성이라는 측면이 포함되기 마련이야.”
“네가 방금 말한 종교는 이슬람 문화권의 종교를 가리키는 거지? 그들은 돼지고기를 왜 먹지 않을까?”

“몰라. 남들이 좋아하는 음식에 나도 똑같은 식욕을 느끼는 건 낭비가 아닐까? 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잖아.”
“돼지가 더러운 짐승이라고 생각해?”
“돼지우리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나?”
“돼지는 잠자리, 식사자리에는 배설하지 않는 동물이야. 다만 섭씨 29도가 한계야. 넘어서면 어디나 배설해. 37도에 이르면 죽고. 체온 조절을 못하는 동물이지.”

“더워지면 더러워진다?”
“그늘이 필요하고 물기를 축여줘야. 숲지대나 그늘진 강둑에서 길러야 하지. 풀밭에서는 번식하지 못해.”
“생긴 것과 달리 까다롭군. 초식동물인가, 돼지?”

“풀 먹는 돼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어. 주로 곡식을 먹지. 다른 가축들은 사람이 먹지 않는 걸 먹지.”
“입맛이 그러니 기근이 닥치기라도 하면 돼지는 곧바로 인간과 직접 경쟁하는 사이가 되는 거야. 먼 곳으로 이동하면서 사육하기도 어렵겠고, 여러 가지로 어렵겠군.”
“쟁기나 수레 끄는 돼지 본 적 있어?”

“돼지가 노동력은 없지. 경작지로 출근하는 돼지 못 봤어. 어울리지 않아.”
“돼지가죽으로 만든 가방이나 핸드백 들고 다닌 적 있어?”
“자랑할 일은 아니지.”
“돼지 알이나 젖은?”

“소나 양이나 닭도 하는 일을 못하니 투자 가치가 적네. 돼지를 길러서 얻을 수 있는 게 고기뿐이라면.
“특히 사막이나 초원에서는 경제적인 가치가 없는 거지.”
“돼지가 더러운 동물이라기보다 사치품에 가깝다고 느껴지는걸.”
“시원한 그늘에서 사람과 같은 종류의 음식을 먹다가 살이 쪄야 겨우 먹을 수 있는 가축이라면 좀 곤란하겠지.”

“돼지를 사랑하면 어쩔 수 없지.”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맛있다는 거야.”
“금기로 못 박지 않으면 여러 부담을 안고도 계속해서 기른단 말이군.”
“사람 사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인구, 기술, 경제, 환경 등 여러 변수가 있으니까 어느 한 측면만을 강조하면 구체적인 현실과 멀어지기 쉬워.”

논술이와 함께 억지공부를 시작한 뒤로 불편해진 점을 적으라면 나는 사람들이 일없이 읽기 좋아하는 허튼 소설이라도 몇 권쯤 펴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내게 굳이 말로 하라는 요청이 온다면 하나만 예를 드는 편이 이모저모 좋을 성싶다. 어느 어른께서, 입 밖으로 나가는 말은 연인에게로 향한 것이 아니면 적을수록 좋다고 이를 때 바로 곁에 있었던 탓이다.

논술이나 나나 어른의 말씀은 잘 듣는 편이다. 과공비례(공손이 지나치면 예가 아니다)라는말을 못 따르며 쩔쩔매는 형편에 그만그만한 예의 지키기를 제 자부심처럼 들먹거렸다면 사람 체면도 따라 줄어들었어야 마땅할 일인데, 그렇다고 논술이에게 유리한 일이라 해서 마다하지 않는 버릇도 없었다. 논술이를 성토하자는 뜻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논술이의 식생활만큼은 아무래도 내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상당히 까다롭지 않은가, 라는 뜻에서 적합한 방식의 말을 찾아본 것이다.
박정우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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