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서 골목으로, 저기 저 조그만 대폿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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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서 골목으로, 저기 저 조그만 대폿집
  • 이천저널
  • 승인 2007.03.2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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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 퓨전 대폿집

   
요즘 살기가 팍팍하다고 한다. 장기불황에 사람들이 지갑을 열지 않아 가게의 물건이 팔리지 않고, 사람들은 꼭 필요한 것 아니면 사질 않는다. 돈이 돌지 않는다고 한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은 오는데 빠듯한 살림을 생각하면, 돈 버는 사람이나 돈 쓰는 사람이나 슬그머니 한숨이 나온다. 요즘에야 보릿고개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실직을 한다든지 집에 우환이 생기면 고비를 넘기기가 옛날 보릿고개 못지않을 것이다.

사남매가 꾸리는 관고동 퓨전 대폿집 ‘탁사발’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곧장 가기에는 뭔가 아쉬운 날이 있다. 긴장의 연속인 일터에서 벗어나 피곤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집에 들어가면 더 좋을 것이라는 유혹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는 곳이 있다면 ‘딱 한 잔’을 외치며 찾는 술집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주머니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으나 요즘 경제 사정을 반영하듯 사람들은 저렴한 퓨전 대폿집을 많이 찾는다.

대폿집하면 이제는 연로하신 아버지들의 모습과 겹쳐 떠오른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우리 사회가 산업화에 휩쓸리며 너나없이 고된 노동으로 힘겹게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일자리를 찾아 식솔들을 이끌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느닷없이 ‘노동자’로 불리던 사람들에게는 더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몸은 파김치가 되었으나, 집에 오는 길에 마신 막걸리 한 사발에 얼굴이 불콰해져서 모든 시름을 잊고 편안해하던 아버지들. 아랫목 이불속에 따끈따끈한 밥주발이 식지는 않았을까 만지면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가족들이 밤이 깊어 깜박깜박 졸고 있을 때, 멀리 골목 밖에서 발자국 소리 들리고 시큼한 술 냄새를 풍기며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갑자기 집안은 떠들썩해지고 웃음소리가 난다.

이런 추억을 간직한 세대는 아버지라는 이미지 속에 자연스럽게 대폿집도 자리 잡고 있다. 대폿집에서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던 시간은 아버지만의 유일한 휴식시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막걸리는 쌀로 빚어 구수하고 알코올 도수도 낮아 서민들이 즐겨마셨다. 안주도 김치 하나면 훌륭해서 갈증이 나거나 배가 고플 때 한 사발 ‘쭈욱’ 들이키고 나면 한 끼 식사로도 그만이다. 60~70년대 가난과 고달픈 일상에 시달린 서민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줬던 추억의 막걸리가 요즘은 퓨전 대폿집이 곳곳에 생기면서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맥주와 양주, 포도주에 밀려 냉대를 받던 전통 막걸리가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맛으로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왔다.

요즘 옛날 막걸리 집 분위기를 연출해 뜨는 술집이 늘고 있단다. 퓨전 대폿집이 그중 하나다. 우리가 간 곳은 관고동에 있는 ‘탁사발’이라는 상호를 단 집인데, 전국에 250여개가 있는 체인점 중에 하나다. 이천에만도 여기 말고 터미널 부근에 한곳이 더 있다고 한다.

   
김정태 씨가 친누나 셋하고 같이 작년 9월에 문을 열었는데 의외로 젊은이들이 많이 찾고 있어 일 할 맛이 난다고 한다. 가족이 뭉쳐서 가게를 운영하니 일 분담도 잘되고 갈등이 없다고 한다. 누나 셋은 주방에서 각자 특기를 살려 안주를 만들어 내고, 남동생은 홀을 맡아서 손님들을 돌봐주고 있다. 탁자를 붙이고 길게 마주 앉아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단체 손님이 있는가 하면, 구석에서 연인끼리 오붓하게 앉아 속닥이는 사람도 있다. 막걸리 주전자가 여러 차례 채워지고 안주가 바닥을 보이면 주방에서 서비스라고 전을 부쳐 내오는데 넉넉한 인심이 느껴진다.   

이 퓨전 대폿집은 간판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간판 위에 일렬로 붙이고 그 속에 전구를 넣어 간판을 밝히고 있다. 미닫이문을 열고 술청에 쑥 들어서니 둥그런 철판 탁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벽면은 70~80년대 거리 모습이 생각나게 전당포, 귀빈룸살롱, 이발소, 쌀가게, 북경반점 같은 낯익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영락없이 우리 어렸을 때 동네 모습이다. 벽에 붙여놓은 혼·분식 장려 포스터와 <별들의 고향> 영화 포스터가 눈길을 끈다.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면한다.’ 라는 표어도 붙어 있었는데 요즘 세 자녀 낳으면 국가가 지원해주는 모습과 비교된다.

전봇대가 서 있고 전선줄이 늘어진 아래에 탁자를 놓고 막걸리를 마시니 어두운 뒷골목 대폿집 분위기 제대로 난다. 가까운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주거니 받거니 껄쭉한 막걸리를 목으로 넘긴 다음 뜨끈한 두부김치를 한입 가득 먹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옛날의 시큼했던 막걸리와 달리 마시기에 부드럽고 단맛이 도는 얼음막걸리는 맥주의 배부름과는 또 다른 포만감을 주며 서서히 취하게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마음이 흐뭇하게 풀어져 이야기를 나누고 분위기는 왁자지껄 고조된다.  

폼 나는 것 좋아하고 명품 찾는 요즘 젊은 세대들이 퓨전 대폿집을 많이 찾는 이유는 뭘까? 지금 20대나 30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자랐고, 서양문화에 노출이 많이 된 세대라 깔끔하고 서양풍으로 인테리어를 해놓은 곳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주문한 음식은 셀프로 가져다 먹는데 익숙하고, 다양한 소스를 즐기며, 느끼한 치즈를 온갖 음식에 다 넣어 먹으며 서양 음식에 거부감이 없다.

   
그런 젊은 세대가 너무 어렵게 살았던 60~70년대 술 문화가 있는 대폿집을 즐겨 찾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요즘 경제사정을 반영하듯 제일 큰 이유는 술값이나 안주 값이 저렴하다는데 있었다. 네다섯 명이서 저녁 내내 막걸리가 떨어질 때마다 주방을 향해 ‘막걸리 좀 더 주세요’를 외치고 안주도 홍합탕에 김치부침, 통두부 김치를 배불리 먹어도 3만원이 넘질 않았다. 술값이 저렴한 게 맘에 든다. 즐겁게 술에 취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젊은 시절 추억에 몽롱하게 잠기니 좋다. 젊은이들도 70~80년대 복고적인 분위기 속에서 저렴하게 술 문화를 즐기는 눈치다. 이쯤 되니 퓨전 대폿집이 이 시대에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은 이유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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