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 차나 한잔
상태바
데스크 칼럼 / 차나 한잔
  • 이천저널
  • 승인 2007.02.01 1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밥 딜런의 커피 한잔, 천상병의 술 한잔

고속도로에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와이퍼는 쉼 없이 돌아가고, 나는 습관적으로 틀어 놓은 에프엠 라디오를 들으며 평화로운 서울로 입성한다. 톨게이트를 막 통과하는데 라디오에서 밥 딜런의 음악이 팡파르처럼 쏟아져 나온다. <커피 한잔 더 주세요>. 나는 볼륨을 높이고, 정중하게 음악의 세례를 받는다. 바로 그 때 밥 딜런의 옆자리에서 누군가 소리친다. <할머니 한잔 더 주세요>. 그 날 나는 딜런과 천상병의 우연한 환영을 받다 결국 가야할 길을 놓치고 낯선 서울의 재개발 지역을 줄창 헤매고 다녔다.     

“당신의 향기는 달콤하고/  당신의 눈동자는 하늘에 박힌 두 개의 보석과 같고/ 당신의 뒷모습은 단아하고, 당신이 머릿결은 부드럽다/ 당신은 깃털로 만든 쿠션 위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내게는 애틋한 느낌이 들지 않네/ 감사의 마음도, 사랑의 마음도/ 당신의 믿음이 내게는 미치지 않네/ 오직 별 위에 머물 뿐/  커피 한 잔 마시러 거리로 나가야겠네/ 커피 한 잔 마시러 나 골짜기 아래로 내려가네”

- 「One More Cup of Coffee(Valley Below)」(1976)

아마 딜런에게 진정한 포크 음악의 정신을 기대한 이들에게 이 노래는 어쩌면 기대를 저버린 범작일 수 있다. 반면에 그의 음악적 편력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그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맛볼 수 있는 걸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사로잡은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는 한결 같이 좌충우돌하는 자신을 위해 아낌없이 몸을 던졌고, 그것이 때로는 변화의 시대에 저항과 자유의 정신과 만났으며, 또 때로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조와 비판으로 물들기도 했다.

사랑하는 연인이자 정신적 동지였던 존 바에즈와 이혼한 딜런은 한 미모의 모델과 재혼한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딜런은 아직 잠 깨지 않은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그대로 가출을 감행한다. 왜? 그 대답이 바로 이 노래다. 그녀는 별처럼 아름다웠지만, “오직 물건 고르는 법밖에 모르고”, “선반 위에는 책 하나 없고”, “어둡고 괴이한 바다와 같은 마음을 갚졌다. 이 위선이 그를 못 견디게 만들었고, 결국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커피숍에서 우울한 발라드 풍의 자작곡을 부르던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이때 그의 나이 서른 다섯이었다.) ‘별 위’가 아닌 ‘골짜기 아러로.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 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 가는데/ 할머니 등 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빡 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 「酒幕에서」(1966년)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생애의 그늘을 뒤적거린다. 전쟁과 가난,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 혁명, 산업화 그리고 한일 회담… 그러나 분명히 읽을 수 있는 것은 그가 현실에서의 패배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패배자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천상병은 주막으로 간다. 딜런이 커피숍으로 가듯. 그리고 천상병이 그 주막에서 “고향의 뒷산”을 보고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빡 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듯, 딜런은 뉴욕의 커피숍에서 서로에 대한 관계가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지기를 또다시 열망하며 기타를 두드려댄다.

1961년, 케네디는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인간 공동의 적인 압제·빈곤·질병, 그리고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지속적이고 힘든 투쟁의 부담을 함께 지고 나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1963년 11월 23일, 케네디는 암살당한다.
“커피 한 잔 더 주세요.”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이천저널
이천저널
webmaster@icjn.co.kr
다른기사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