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멜로디의 마지막 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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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멜로디의 마지막 화음
  • 이천저널
  • 승인 2006.12.2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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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자신의 삶이 시시해지는 순간이 있다. 남다르게 예민한 감수성에다 선천성 우울증 같은 질병을 가진, 그 이름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예술가들의 치열한 삶을 넋 놓고 들여다 볼 때뿐만이 아닐 것이다. 아직 되는 것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도, 아니면 도저히 수습하기 어려운 수렁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에게도, 그럭저럭 이룰 만한 것을 다 이루고 잠시 다리 뻗고 누워 우두커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게도 때론 삶이 시시하게 느껴질 수 있다.

모름지기 맥 빠지게 만드는 회한의 팔 할은, 우리가 전 생애를 바쳐 걸어온 길이, 그리고 결코 만만치 않았던 그 과정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만의 모험이거나 운명적 선택(아, 이 말을 함부로 쓰지 마라)이 아니라는 데에 있지 않을까?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굴러가는 대로 우리는 왔고, 또 가고 있는 중이리라. 종종 텔레비전에 나오는, 제 발로 해병대에 가서 ‘지옥 훈련’을 받는 사람들을 보거나, ‘서바이벌 게임’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하긴 그렇게라도 해야 분이 좀 풀리겠지!

얼마 전 한 시사 주간지에서 ‘유언장을 씁시다’라는 주제로 조심스럽게(그들은 사람들이 불쾌하게 생각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다), 그리고 진지하게 꾸민 특집 기사는 제목보다 훨씬 따분했다. 진지하게 읽은 사람들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지옥 훈련’이나 ‘서바이벌 게임’에 다름 아니었다. 편집자들이 어렵게 각계 각층의 인사들에게서 받았다는 ‘모의 유언장’은, 재산의 몇 퍼센트인가를 빈곤 퇴치 기금으로 기부한다는 말까지 포함해서 여전히 살아 있는 자신을 비춰보는 데에 급급했다. 그들은 “나 괜찮았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진리이긴 하지만,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최희준의 노랫말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죽음이란 더 이상 “모짜르트를 못듣게 된다”는 김종삼의 시구에도 멀었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라는 책에서 죽음을 “어떤 멜로디의 마지막 화음”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내게, 그저 그렇거나 시시껄렁한 멜로디에 아무리 힘주어 길고, 장중하게, 마지막 화음을 넣는다고 한들 그 음악이, 그 삶이 갑자기 우뢰 같은 박수와 커튼콜을 받을 만큼 감동스러워지는가 라고 되묻고 있다.

중국 혁명기에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낸 구추백은, 러시아 특파원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으로, 그리고 자신을 천거한 진독수를 배신하고 중공당 2대 총서기에 올랐다 다시 좌익 기회주의자로 몰려 파면된다. 그 뒤 소비에트 정부의 교육부장이 되어 공산당 안에서의 지위를 회복했지만 질병 때문에 장정에 참가하지 못하고 후방에 남아 있다 국민당 군에 체포된다.  그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정치에 맞지 않는 기질을 가진 사람이지만 문학자로선 탁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구추백. 그는 유서에서 자신의 짧은 정치 생활을 희극적인 오류이며 ‘역사적인 오해'였다고 말했다.    

“이 세상은 아직도 나에게 아름다운 것이다. 젊고 용기 있는 사람들 모두 당당히 전진하고 있다. 꽃과 열매, 아름다운 산하, 공장과 굴뚝--그 굴뚝은 얼마나 남성답고 아름답게 비춰졌던가! 그리고 달--나는 저 달을 너무 사랑한다. 오늘따라 저 달은 한없이 밝게 비취누나. 안녕 안녕, 그대 아름다운 세상이여!(중략)

자, 이제 그 어설픈 연기는 끝에 다다랐다. 무대는 텅 비어 버렸다. 이제 떠나기 싫어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길고 긴 휴식이다. 내 몸뚱어리가 어떻게 처리되든지 더 이상 알 바 없다. 안녕! 안녕!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 영원한 이별이여!
고리끼의 『클림 삼긴의 생애』, 뚜르게네프의 『루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노신의 『아Q 정전』, 모순의 『망설임』, 조설근의 『홍루몽』---이 모든 것들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중국 두부는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 안녕, 영원히 안녕!”
1935년 6월 18일, 구추백은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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