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떠난 아들을 잊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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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떠난 아들을 잊지 마라
  • 이천저널
  • 승인 2006.12.14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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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이맘때쯤 러시아의 망명 시인 리진 선생에게 인편으로 서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에 관한 평전을 쓰고 싶어서였다. 인편에 허락은 받았으나 그 뒤로 다시 연락이 안 되고 이런저런 일도 생겨 은근히 작업을 미루는 빌미로 삼았다. 연세도 높으신데 잘 계시는지. 문득 그의 삶을 떠올려본다. 그 노시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리진은 1930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열다섯의 나이에 해방을 맞으면서 ‘남과 북’, ‘좌와 우’라는 엄청난 선택을 강요받았던 그에게 ‘무계급 평등 사회’라는 말은 복잡한 정치 현상들과는 차원이 다른 힘과 매력으로 다가왔다. 함흥고등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8년, 김일성 종합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 몇 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학적 재능을 선보이던 그는 공산당 입당을 권유받는다. 그러나 그에게 공산주의자와 공산당원은 “그 당시 벌써 반드시 동의어가 아니었”다. 그는 정식 입당 권유를 ‘자격 부족’이라는 구실로 물리친다.

그리고 1950년 6월, 김일성 종합 대학 학생의 신분으로 인민군에 입대해 한국 전쟁에 참전한다. 1951년, 의주까지 후퇴한 그는 소련 유학을 권유받고 그 해 가을, 러시아 전연맹(全聯盟) 국립 영화 대학 국문학 및 평론학부에 입학한다. 이 소련 유학 생활은 그에게 ‘사회주의 조국’의 현실을 보게 했다. 그러던 중 1956년 2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가 열렸다. 이른바 ‘gm루시초프 해빙기’가 시작된 것이다. 소련의 당-사회 생활 민주화 노선은 그에게 “사회주의 사회는 원칙적으로 개량될 수 있다는 생각과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김일성 독재 체제로 들어간 북한 지배층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은 20차 당 대회 지지자들을 수정주의자들로 몰아 당-국가 기구에서와 사회 단체, 교육 기관들에서 제거 축출했고, 그 대회 이후 귀국한 소련과 동구권 유학생들에 대해 원시적인 폭력과 박해로 대처했다.
“우리의 유학생 옹호 운동은 곧 반체제 운동으로 자라났습니다. 수령주의 극복과 당-국가-사회 생활의 민주화, 온갖 종류의 부당한 박해의 중지와 준법성의 준수, 국민 생활에 대한 실질적인 배려, 6?25를 비롯한 여러 엄중한 과오에 대한 냉철한 비판, 범죄적인 무력 통일 망상의 포기… 이것이 우리가 그 시기에 제기한, 후일 생각하여 보면 정말 분수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을 요구였습니다.”

결국 귀국이 불가능해지고, 납치 사건이 거듭되자 그는 북한 시민권을 포기하고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망명 생활의 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그는 모스크바를 떠나 소련 국적도 포기한 채 무국적자로 볼가 강변의 크지 않은 한 숲속 마을에서 공산주의의 이상을 가진 이방인으로, 그리고 시인으로 30여 년을 살게 된다.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보면서 “실로 오래고도 고통스러운 과정, 많은 점에서 흔히 자학적인 자기 인식의 과정”을 통해 공산주의와의 사상적 결별을 선언한다.

1992년, 한국문인협회는 그에게 해외 문학상을 수여했다. 그 시상식장에서의 일화를 그의 오랜 망명 동지인 허 진은 이렇게 전한다.

“알마타 조선극장 수상식에 참석한 100여 명의 한국 문인들은 시인의 훌륭한 답사를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의 입에서 나온 답사는 ‘감사합니다’ 한 마디뿐이었다. 나중에까지도 그는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외에 더는 할 말이 없더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나는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그의 시에서 읽는다. 벅찬 감격을 억누르는 늙은 망명 시인의 떨리는 마음으로 또박또박 읽어본다. 

숲의 먼 끝에 한 그루 외따로/ 구부정 소나무가 서 있다/ 로씨아땅에서 보기 드문/ 구부정 소나무가 서 있다//  그 곁을 지날 때면 언제나/ 가만히 눈물을 머금는다/ 저도 몰래 주먹을 쥔다/ 가슴이 소리 없이 외친다/ 멀리서 아끼는 사랑이/ 얼마나 애틋한지 아느냐/ 길 떠난 아들을 잊지 마라/ 구부정 소나무의 내 나라
「구부정 소나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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