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이천 시민 먹여 살릴 새로운 성장 동력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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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이천 시민 먹여 살릴 새로운 성장 동력 만들어라”
  • 이천저널
  • 승인 2006.11.09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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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쌀 축제는 농경 문화의 상징일 뿐 대안일 수 없다”
“코카콜라 공장이 아틀란타의 상징이 된 사례를 직시하라”
“단임제 시장의 한계 지역민들의 중지 모아 벗겨주어야”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과의 본지 창간 13주년 기념 대담은 처음부터 뜨거웠다. 그는 평생을 역사 연구에 바친 학자답게 “정권 유지나 주의 주장을 위해 역사를 악용하지 말라”는 쓴소리로 요즘의 세태를 비판했다. “뉴라이트들의 주장이나 전교조의 주장이나 다 마찬가지예요. 한쪽은 일제의 식민지 개발론에 너무 묶여 있고 다른 한쪽은 자생적 민족주의 경제론에 빠져 있어요.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지만, 걱정은 두 가지 주장이 너무 극과 극이라는 거죠. 그 중간을 택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는 또 세계화에 대해서 “세계화에는 자기의 지분을 가지고 동참해야”한다며, “자기의 지분이란 자기의 역사화 문화”라고 강조하고, “문화는 잡된 것이고, 다른 것을 생명으로 여기는데, 이천이 앞으로 무엇을 경쟁력으로 삼을 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며 이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이천이 어렵게 생겼다”고 전제하고, “뉴질랜드 같은 곳은 남쪽 섬은 아예 개발을 안 한다. 자연을 살려 관광객만 유치해도 공장을 짓는 것 보다 낫다는 얘기다. 앞으로는 자연녹지가 더 중요한 자산이 될 수도 있다”다고 자연 친화적인 도시 개발을 전망하면서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작품의 배경이 된 미국의 아틀란타라는 도시는 코카콜라라는 회사가 들어서면서부터는 코카콜라가 아틀란타의 하나의 심벌이 되었다. 코카콜라 박물관이 대표적인 아틀란타의 관광 코스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게 다 아틀란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거”라며 이천시가 첨단 산업 유치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쌀 축제를 하는 건 좋지만, 그것으로 뭐가 되는 건 아니”라며, 그 대안으로 “이명박 시장이 만든 게 ‘뉴타운’이라는 게 있다. 그 뉴타운은 IT 산업에 대학을 끼워 넣는다. 교육 기관, 연구 기관, 공장 이렇게 연계해서 뉴타운에 사는 사람들이 먹고 살게 만들어주는 거다. 서울시는 그걸 5개나 만들었다. 그런 아이디어가 필요한 때다. 대학도 그냥 오라고 하면 오겠는가? IT산업을 중심으로 국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인프라를 조성해주어야 한다”며 서울시의 뉴타운 정책을 소개하기도. 
그러나 이천뿐만이 아니고 다른 지자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만 “지금처럼 단임제 시장으로서는 어려운 점이 많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역사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이천 시민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연구를 해야 한다”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이천의 문제를 풀어나갈 것을 제안했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때도 평화조약을 맺는데 우리는 끼워주지 않았다. 조선은 빼고 명나라하고 일본하고 했다. 해방을 맞을 때도, 6.25정전 협정 때도 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건 역사적으로 보면 상당한 맥락이 있다고 본다”며 최근의 국제 관계에 대해서도 역사학자로서의 독특하고 예리한 견해를 펼쳤다.   
“우리가 어떤 주장을 펼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아닐 때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 카드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너무 한 가지에만 매달리다 보면 그게 아닐 때 대안이 없다”고 말한 이성무 원장은 “지도자들이 역사에 대해 알아야 위기도 알고 대책도 세운다”며 현 재의 국제 정세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이천은 수도권 지역의 성격을 잘 알고 거기에 맞게 역할 분담을 해야”

-몇 해 전 국사편찬위원장으로 계실 때 라디오에서 선생님의 개천절 기념사도 들었고, 또 지난해 여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셨다는 뉴스도 들었습니다. 요즘 근황은 어떠십니까?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단체가 있어요. 정부 관료 출신, 언론인, 기업가 등 한 100명 정도 되는데 우리 역사를 얘기하는 모임입니다. 시발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가 터지면서 우리의 역사 교육 부재에서 비롯해 우리 자신들이 역사 인식에 더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서 우선 우리나라 지도층이 역사 인식부터 바꾸자는 저의 제안으로 시작됐지요. 두 달에 한번 씩 모임을 갖고 있는데 그 일에 제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지요. 회장은 정희경 청강대학 이사장님이 맡고. 유승우 씨, 이규택 씨도 있고, 광주요 이사장, 해강요 유광열 씨 같은 이천 분들이 많아요. 아무래도 내가 이천사람이니까.”
-사교 모임인가요?
“사교 모임이라도 역사를 중심으로 모이는 거니깐 성격이 좀 다르죠. 답사도 다니고. 그 모임을 3년 하다 보니 우리끼리만 모이면 뭐 하냐 밖으로 다니면서 얘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해서 연구원을 하나 만들었어요. <한국역사문화연구원>이라고. 요즘은 그 원장 일을 보고 있지요. 역사 문화 최고 지도자 과정도 개설하고 평생 교육  차원에서 한문 교육도 하고 그럽니다. 그동안 이곳을 거쳐 간 분들이 100여명 이상 됩니다.”
-역사 문제라니까 요즘은 일본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먼저 떠오르는군요.
“중국사람 거짓말로 유명합니다만, 과거에는 “고구려가 우리 역사다”라는 그런 주장한 적이 없어요. 또 그렇게 했을 때 “아니다” 하고 그냥 무시하면 됐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너희들끼리 떠들어라.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할 거다. 너희는 손대지 마라.” 이렇게 나가니깐 당혹스럽죠. 행동하는 강대국을 막을 재주는 없어요. 힘으로 밖에. 일본도 걱정스러운 부분이 그거예요. 미국만 눈감아주면 어떤 일이든 저지를 태세입니다. 무력이나 국방력으로 우리는 못 당해요. 민족주의 좋죠. 하지만 자꾸 잃기만 한다면 노선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
-현 정부는 지금 그런 능력이 된다고 말하고 있잖습니까?
“글쎄요.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능력이 된다면 그렇게 행동하면 되지 주장은 왜 합니까? 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도 안 하는데. 그런 처지가 아니지요. 미국이 공평하다고 생각해요? 힘이 있으면 깔아 뭉게버리면 되지 안 쓰고 버틸 이유가 없죠.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무리가 오고 정세에 안 맞는다는 거지요. 그런 걸 이론적으로 까부실 수는 없는 겁니다.”
-선생님께서는 평생 역사만 공부하셨는데 역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사가 무엇이냐는 것보다 역사에 대한 비판부터 해야겠어요. 역사를 동양사, 서양사, 국사로 나눈 게 잘못이지요. 그렇게 좁게 가르치면 안 되는 거였어요. 안목이 좁아요. 우물안 개구리라는 거죠. 지금 세계는 이런 사관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박정희 시절에 민족적 민주주의를 한다고 국사가 만들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동양사와 서양사가 다 따로 갈라진 겁니다. 예전에는 사학과였어요. 그게 맞는 거죠.
요새는 논리가 필요 없어요. 이건 독재고 이건 민주고 이미 구분이 되어 있어요. 역사는 있는 그대로 하는 거지 정권 차원이나 주의 주장을 위한 근거로 활용한다는 건 역사가 악용이 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실종되었다고 봐요. “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독일도 히틀러의 역사주의도 그랬고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지요. 권력하고 연결되어 있으니깐 조금만 잘못하면 박해당하고, 학자들은 약하거든요. 뉴라이트들의 주장이나 전교조의 주장도 다 그래요. 한쪽은 일제의 식민지 개발론에 너무 묶여 있고 다른 한쪽은 자생적 민족주의 경제론에 빠져 있어요. 농업의 발전으로 가만 뒀으면 자본주의로 갈수도 있었다. 그랬는데 외세가 와서 우리가 안 된 것이다. 이거예요. 사실은 우리도 젊었을 때 조사해 봤지만 근거가 없어요. 시작도 그렇게 했지만 했어도 중도에 좌절하고 말았을 거고. 정치와 연결도 안 되고. 그런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지만, 걱정은 두 가지 주장이 너무 극과 극이라는 거죠. 그 중간을 택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해요. 
우리가 어떤 주장을 펼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아닐 때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 카드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너무 한 가지에만 매달리다 보면 그게 아닐 때 대안이 없어요. 임진왜란 때도 평화조약을 맺는데 우리는 끼워주지도 않았어요. 조선은 빼고 명나라하고 일본하고 했지요. 또 6.25 때도 낄 수가 없었잖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역사적으로 보면 상당한 맥락이 있다고 봅니다. 힘도 없으면서 소리만 지르다 결국 따돌림만 받는 거지요. 정작 자기 일에는 끼지도 못하면서 다른 놈들이 결정하고, 그래서 그어진 것이 38선 아닙니까. 지도자들이 역사를 좀 알아야 위기도 알고 대책도 세우고 하는 건데…”
-최근에 텔레비전의 역사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주몽>을 비롯해 <연개소문>과 <대조영>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역사의 사실성 문제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역사 드라마에서의 사실성 문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대하 드라마는 시청률과 관계가 있어요. 드라마 제작자들은 시청률이 떨어지면 모든 게 끝이에요. 대개 주시청자 층이 아줌마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거지요. 자연스럽게 남녀 관계가 있어야 하고, 권력이 왔다 갔다 하는 극적인 스토리가 전개되어야 되고, 또 아기자기해야 하니깐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만을 기초로 전부 허구를 만드는 거예요. 사실에 기반을 둔다면 연개소문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느니, 연개소문이 안시성 싸움을 진두지휘했다든지 하는 설정은 있을 수가 없죠. 무엇이든 이슈화해야 하니까 사실을 꾸며서 바꾸고 심지어 족보까지도 바꾸어요. 그럼 안 되는 거지요. 한번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갔다가 극작가 신봉승 씨를 만났어요. 제가 왜 있지도 않은 일로 거짓말로 하느냐니깐, 그 분 말이 “저희는 소설가 입니다. 픽션으로 만드는 것이 일입니다. 하지만 족보를 뒤바꿔 놓을 정도는 아닙니다. 남녀 관계라는 것은 역사 기록에 없으니까 우리가 만드는 것이지만요” 하더라고요.”
-얼마 전엔 신도시 얘기로 이천이 잠시 술렁거렸습니다. 어떤 형식으로든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데 변화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변하지 않는 것 속에 변화 아닙니까? 이천이 지닌 불변의 여건이나 역사 문화적 전통 같은 게 있을 법 한데요.
“내가 이천 출신이다 보니 이천의 역사에 대해 몇 번 강연한 적이 있어요. 흔히 이천 사람들에게 깍쟁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잖아요. 그게 서울 근처, 곧 근기(近畿)에 있다는 지리적 이유 때문이지요. 흔히 4대문 안과 그 성곽을 둘러싼 10리 안팎을 경(京)이라고 하고, ‘경’에서 가까운 곳을 ‘기(畿)’라고 합니다. 서울인 경으로부터 보통 500리까지의 지역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근기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수도권이지요.
근기라는 지리적 조건은 서울하고 호흡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이 운명이에요. 또 권력하고도 불가피하게 가까울 수밖에 없고요. 이천 일대가 조선 말기에 세도가 안동 김씨들의 텃밭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됩니다. 관계를 안 할 수도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것이 운명이었던 거지요. 이천은 이런 근기의 지역의 성격을 잘 알고 거기에 맡게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억지로 독자 노선을 가겠다고 주장하면 안돼요. 서울하고는 항상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맥이 통해야 하니까요. 우스운 얘기지만 이천에 깡패들이 많이 나오는 것도 이런 조건과 무관하지 않아요.”
-세계화란 말이 이제는 일상어로 쓰일 만큼 흔해졌습니다. 역사를 공부하신 분으로서 세계화란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좀 설명해주십시오.
“21세기는 지식 기반 사회요, 정보화 사회라고 합니다. 컴퓨터, 인터넷 등 정보 매체가 발달해 지구촌이 하나가 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일수록 정보화에 빠른 선진국들이 주도하게 되고 , 여기에 늦은 후진국들은 선진국이 하는 대로 맹종하게 됩니다. 국경이나 영토, 민족이 희미해지고 정보 선진국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세계화가 그것입니다.
세계화에는 자기의 지분을 가지고 동참해야 합니다. 자기의 지분이란 자기의 역사와 문화를 말합니다. 나라마다 자국사가 있고 자국의 문화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국사 자국 문화는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자국의 특이한 자존심입니다. 이런 각국의 역사와 문화가 종합되어 세계 문화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
-이런 세계화 속에서의 이천을 생각한다면  
“세계화를 생각한다면 이천은 적지는 아닙니다. 우선 바다가 멀어요. 인천이랑 비교해보면  예전에는 둘 다 그저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어중간해요. 강원도처럼 아예 산골도 아니고, 서울이랑 맥락은 있으면서도 여러 조건을 따질 때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거예요. 심지어 파주하고도 안 되거든요.  ▶ 앞면에 이어
정확한 구색은 따져 봐야 알겠지만, 입지조건 면에서 그래요. 서울과의 거리도 멀어요. 공업용수나 식수도 남한테 의지하는 형편이니까요. 복하 가지곤 약해요. 특별한 광물도 없고. 다행이 산이 없어서 일조량이 많고, 과수, 쌀, 특용 작물들은 잘 됩니다.
도자기도 아이템은 잘 잡았는데 세계하고 경쟁이 되어야 하는 거죠. 일본은 고유의 기술이나 문화는 약했지만 19세기에 공업 도자기로 세계를 휩쓸었거든요. 옛날의 청자나 거들먹거릴 때가 아니라구요. 거기서 지는 겁니다.
이천이 무엇을 경쟁력으로 삼을 건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되요. 앞으로는 자연녹지가 더 중요한 자산이 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다 내보내기에는 서울이랑 너무 가깝구요. 하이닉스 정도가 잘 되면 좋을 법한데. 제주도도 고민이더라고요. 감귤 가지고는 이제 안 된다는 거예요. 감귤로 경쟁력을 가지려면 제주도 전체가 감귤로 나가야 하는데 주민들이 반대를 하는 거죠. 국제도시에 걸맞게 공항을 좀 크게 지으려고 해도 주변에 땅을 가진 주민들의 이익과 배치되면 성사되지 못하는 거예요.
이천이 어렵게 생겼어요. 뉴질랜드 같은 곳은 남쪽 섬은 아예 개발을 안 하잖아요. 왜 안하겠어요. 자연을 살려 관광객만 유치해도 공장을 짓는 것 보다 낫다는 얘기죠. 역사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포괄적인 연구를 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단임제 시장으로서는 어려운 점이 많을 겁니다. 이천뿐만이 아니고 다른 지자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예요.
얼마 전에 안산이라는 곳에 초대받아 갔는데 거기서는 성호 이익 선생을 상징적인 인물로 내워죠. 제가 성호학회 회장이라 연설하면서 그랬어요. 안산은 재수있는 도시다. 안산공단도 있고 바다도 가깝고, 또 성호 이익 같은 인물도 있고…
-대신 이천에는 서희 선생이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이천에는 서희 선생이라도 잘 내세워 문화 전통을 살려야 되는데 그 작업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김대중 정부 때 얘긴데 김 대통령이 외교관들을 모아 놓고 “서희 같은 훌륭한 외교관이 되시오” 라고 덕담을 했더니 그 얘기를 듣고 어떤 이가 서희 학술회를 만든다고 해프닝을 벌인 일도 있어요. 그때 이천에서는 그 회의 참석한 학자들을 대접하고 그랬던 모양이더라고요. 전 대통령 대신 서울에서 축사만 하고, 이천엔 내려가지도 않았어요. 뭘 하려면 좀 제대로 해야죠.”
-이번 가을에도 이천에서는 다양한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이천 쌀 문화 축제도 성황을 이뤘는데...
“쌀 축제는 농업 사회의 상징이이지요. 축제를 하는 건 좋은데 그것으로 뭐가 되는 건 아니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작품의 배경이 된 미국의 아틀란타라는 도시는 코카콜라라는 회사가 들어서면서부터는 코카콜라가 아틀란타의 하나의 심벌이 되었어요. 코카콜라 박물관이 대표적인 아틀란타의 관광 코스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다 아틀란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거예요. 이천은 서울하고 가깝고, 큰 강도 없고 하니 공해 산업은 안 될 거고, IT 산업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지금은 고속도로도 잘 뚫려 있으니까 인천으로 이동하기도 좋고. 그 방법밖에 없을 거예요. 농경 사회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 점에서 내 생각엔 하이닉스가 공해도 적고, 고용 면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단순히 공장만이 아니라 그 기업을 중심으로 학교나 연구 기관, 주거 시설이 함께 들어와야 자족 도시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텐데요.
“얼마 전에 한 인터넷 신문에서 내가 서울의 미래에 대해서 얘기하다 이명박 시장과 관련한 이야기를 했어요. 버스 중앙 차로제라는 게 처음에는 얼머나 비난이 많았습니까. 지금은 어때요. 외국에서 벤치마킹하러 옵니다. 또 이 시장이 만든 게 뉴타운이라는 게 있어요. 그 뉴타운은 IT 산업에 대학을 끼워 넣더라고요. 교육 기관, 연구 기관, 공장 이렇게 연계해서 뉴타운에 사는 사람들이 먹고 살게 만들어주는 거지요. 그걸 5개를 만들었더라구요. 그런 아이디어가 필요한 때입니다. 대학도 그냥 오라고 하면 오겠어요? IT산업을 중심으로 국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인프라를 조성해주어야 하는 거지요. 이천시에 대해서 많이 연구를 해야 합니다. 테스크포스팀을 하나 만들어 가지고 앞으로 이천 시민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연구해야 합니다.”
-이천 시정을 돌보는 시장님께 보탬이 될 만한 말씀을 해주신다면.
“저도 기관을 운영해 봤지만 할일이 있어야 예산을 따는 것이지 맹목적으로는 돈을 안주거든요. 그러니까 예산을 따낼 때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설득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승정원 일기> 번역 사업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달려들었더니 처음에는 들어주지도 않아요. 지금까지 잘 살아왔는데 그 책이 왜 갑자기 필요하냐는 거예요. 그래서 그 책을 1년 안에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해가지고 오면 해 주겠냐 하니까 그때는 해 준다는 거야. 그래서 <승정원 일기>를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시키고 나서 150억 원이라는 예산을 따낼 수 있었던 거지요. 
잔소리 같지만 필요에 따라 중앙부처를 찾아갈 때도 왜 장관이나 차관을 만납니까? 방법이 잘못된 거예요. 주사를 찾아 가야지요. 그 사람들에게 정보를 얻어서 단계적으로 추진해가다 마지막에 서류가 올라오면 허가를 해주십사 할 때 장관을 만나는 겁니다. 요즘 장차관이 아랫사람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못 합니다. 장관들한테 바로 가면 방법이 없는 거예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대통령이나 영부인을 좀 만나야겠는데 만날 기회가 없어요. 그래 꾀를 내서 전화를 했죠. “제가 <승정원 일기>라는 책을 하나 냈는데 거기에 외국 귀빈들이 많이 오니 하나 설치 해두면 좋은 것 같으니 제가 하나 기증하겠습니다.” 했더니 바로 가져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책을 들고 돌아갔어요. 그리고 만나서는 5분 안에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상대를 설득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하는 거예요.”
-앞으로 하시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
“작년에 ‘뿌리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전통을 사랑하는 모임인데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도 좋지만 농업 사회에서 생긴 전통을 그대로 산업 사회에 가져다놓으면 맞질 않거든요. 전통이 못 쓸 것도 아니고 우리 문화의 중심이 되는 것이니 현대에 맞도록 연구하자, 또 전승을 하되 일본도 못하고 우리나라도 못한 전통에 대한 비판도 하자, 이런 취지를 가지고 만든 모임예요. 전통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잖아요. 당파나 가족이 그래요. 의리며 가족애는 좋지만 이해에 따라 변절한다든지 또 배타성 같은 건 나쁜 전통이지요.
강령을 몇 가지 만들었어요. 첫째가 당파를 말하지 말자. 둘째, 적서 차별을 하지 말자. 셋째 남녀 구별을 하지 말자. 이거예요. 그건데 의외로 이 모임이 굉장히 인기가 있어요. 여기 안 들면 축에 못 낀다는 소문이 났다나요. 저명인사들을 모시고 일 년에 한두 번 씩 공개 강의도 하고, 목표는 돈이 안 생겨서 그렇지 세계족보학회를 만드는 거예요. 돈보다는 한국은 명분주의니깐 명분을 갖는 거죠. 뿌리회 세계족보학회를 만들면 종주권을 갖는 거니까요.”

이성무(李成茂), 그는 누구인가?

1937년 충북 괴산에서 나서 이천 장호원에서 성장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미국 하버드 옌친 연구소 연구교수
독일 튀빙겐대학 객원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현재 한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저서로는 <한국의 과거 제도>,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 <조선시대 당쟁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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