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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만보산 사건 허위·왜곡 보도 韓·中 민간인 수 백명 사상자 발생
2018년 07월 31일 (화) 10:51:53 박인식(KCJ국제관계연구소)박사 news@2000news.co.kr
   
 
  ▲ 박인식(KCJ국제관계연구소)박사  
 

만보산(萬寶山) 사건은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완바오산 지역에서 조선농민과 중국농민 사이에 일어났던 충돌 사건이다.

관동군 특보기관은 일본 중앙정부의 의견을 무시하고 재만 조선농민을 이용하여 대륙 침략을 위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바로 만보산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만보산(완바오산: 萬寶山)은 지린성 창춘(長春)에서 서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린성 정부의 국민정부 외교부에 보고된 것에 의하면, 사건 개요는 1931년 4월 16일 일본관헌이 비밀리에 매수한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의 경리 학영덕(郝永德: 하오융더)을 이통하 (伊通河: 이퉁허)의 동쪽 삼성번(三姓堡: 싼싱바오) 일대 소한림(蕭翰林) 기슭에 있는 만보산 지역의 미개간지 약 3㏊를 차지(借地)한 것을 다시 조선농민 이승훈(李昇薰) 등 8명이 10년 기한으로 조차계약을 맺어 개간을 한다.

그런데 조차계약 조항 중에는 “조지(租地)계약은 창춘현(長春県)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만약에 현 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하게 되면 무효”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영덕은 현 정부의 허가를 받기 전에 조선인 이승훈(李昇薰) 등에게 전조계약(轉租契約)을 함으로써 위약으로 분쟁의 소지가 있었다.

이승훈 등은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재만 조선농민을 만보산 농장으로 180여 명이나 불러들었다. 그때 학영덕은 순수한 조선인 농민에게 이통하(伊通河)를 절단하게 하고 불법으로 계약한 토지와 이통하 사이에 수로를 개착하게 하였다. 중국인 지주들과의 분쟁이 야기되었지만, 조선농민들의 수로개척은 일본 장춘영사관 경찰의 보호 아래 강행되어 6월 말에는 거의 완성될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름이 닥쳐오면서 이통하의 범람을 우려하던 중국인 지주와 현지 주민 약 400명은 7월 2일 수로공사 현지로 달려와 개착한 수로를 매몰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마침내 현장에 있던 조선인 농민, 일본 영사관 경찰과 중국인 지주, 주민 사이에 일대 충돌이 일어났다. 그 후 점차 중일양국 경찰이 서로 증원되고 약간의 총격전도 벌어지게 되면서 분쟁도 격화되어 갔다. 그러나 다행히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은 채, 중국인 지주와 주민들이 일단 철수하면서 진정되었다.

 

한국 근대언론의 치욕스런 역사 찌라시 같은 허위 지면, 뼈 아픈 역사의 그림자

그런데 일본 관동군은 창춘 영사관측을 이용하여 조선일보 지린성 창춘지국장 김이삼((金利三, 본명: 김영석, 동아일보 지린특파기자 겸임)이 일본영사 다시로· 시게노리(田代重德)가 전달해 준 일방적인 주장 내용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양사에 「특급전보」로서 송부했다.

7월2일 우선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했다. 그 표제는 「중국 관민 800여 명과 200동포(조선인)충돌 부상」, 「대고개 밑 일중관헌 한 시간여 교전 - 급박한 동포의 안위」, 「전투준비중」 등이었다. 김이삼의 송부기사는 자극적이고 과장된 허위기사로서 센세이션한 형태로 보도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만보산 사건은 조중 민족간의 단순한 일이 아니라 중일의 국제문제화가 되고 말았다.

당시 동아일보와 맹렬한 경쟁중에 있던 조선일보는 특보로서 대서 특필하여 조선민중의 여론을 들끓게 하였다. 처음 이 사건이 보도되자 신속한 보도를 한 조선일보는 세평에서 완전히 동아일보를 눌러 버렸다. 이렇게 되자 4일에는 『동아일보』도 같은 기사를 실었다.

만보산 기사가 보도되자 이튿날 조선일보 조간을 받아본 이리(裡里) 지방(지금의 익산)에서는 당장, 중국인 박해사건이 일어 났다. 조선내 신문들은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오보를 하면서, 조선내에 거류하는 중국인을 파괴하는 운동을 도발시켰다. 이리에 이어서 인천을 필두로 경성·원산·평양·부산·대전·천안 각지에서 수천 명의 조선인들은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평양과 부산과 천안에서는 대낮에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학살하는 사건이 며칠간 계속되는 등 잔인한 폭력사태로 확산되었다. 일제는 매수한 김이삼을 통해서 조작된 기사를 보도하게 하였고, 부산과 천안에서 불량배를 매수하여 폭력행위를 조장하였다. 며칠 후 동아일보 등이 오보임을 알리고 진정을 호소하는 보도로 7월 10일 이후로 약화되었다. 조선의 민간신문사측에서는 신속히 진상조사와 동포위문을 겸하기 위해 조선일보는 신영우, 동아일보는 서범석 등, 양기자를 각각 창춘에 특파한 후 관계 각처를 방문하였다.

김이삼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국적의 조선인이었다. 김이삼은 1920년 중반부터 창춘에 있으면서 재만동포 관련기사를 경성으로 보냈다. '재만동포문제의 전문기자이기도 하였다. 1920년대부터 1931년 7월까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장춘에서 김이삼이 보낸 기사를 실었다. 김이삼은 적어도 1927년 말까지는 동아일보 장춘지국 기자였다. 그리고 기자연맹 통신원으로 활동도 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일보 특파원을 하였다. 김이삼은 장춘에서 재만조선인 문제의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재만동포옹호동맹'을 비롯해 각종 사회운동단체의 지도적인 인물이었다.

만보산 사건의 오보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인 김기진의 증언에 따르면, 김이삼은 김좌진 피살 사건(1930.1)이 일어났을 때 “조선일보에 신속하고 정확히 기사를 보내온 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김이삼이 만보산 관련기사를 보냈을 때 조선일보는 사건의 사실 여부를 확인은 커녕 의심도 없이 호외까지 내었다. 김이삼은 1931년 4월부터 벌어지고 있던 만보산 지역사건 소식을 그때마다 조선일보에다 보내왔으며 기획기사를 송고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도 지속적으로 만보산 지역에서 벌어지던 일을 보도했고 제목부터 독자를 자극하는 기획기사를 싣기도 했다. 1931년 6월 24일자 신문에는 강계지국 기자인 오윤진이 쓴 기획기사를 실었는데 제목은 「전장같은 만보산, 부유같은 400생령-중국 관현의 폭압 밑에 그 장래가 불안창검리에 안부는 여하」였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관련기사를 경쟁하듯이 실었다. 만보산 사건은 언론에서 대단히 주목을 받던 사건이었다. 그러다 조선일보는 김이삼 특파기자한테 대규모 충돌이 있었다는 급전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만보산 사건은 일본 관헌의 기자매수로 인한 허위오보로 한중의 불행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것이다.

조선일보는 7월 2일 석간과 3일 조간 두 차례에 걸쳐 호외에 「중국 관민 800여명과 200 동포충돌 부상」, 「주재경관대 급보로 장춘주둔군 출동준비」, 「삼성보에 풍운점급」이라는 표제로 게재하고, “2일의 충돌로 다수의 조선인이 사망했다”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를 계기로 조선에서의 중국인에 대해 감정은 악화하고, 일본에서도 재일조선인이 재일중국인을 배척해 습격하는 사건이 잇따랐다. 이것은 조선일보 호외 등의 과장된 허위보도에 기인된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측이 재만조선인을 일제의 대륙침략의 앞잡이로 간주하고 ‘미츠야 협정(三矢協定)’에 근거하여 이들을 압박한 데에서 조·중 양민족의 감정대립도 간접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일본당국 및 그 뜻을 받아드린 신문들이 대대적인 보도로 중국인 습격·살상이 한국·일본 등지에서 행해졌으며, 일제측의 선동과 은밀하게 이면 공작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

7월 8일 이를 간파한 경성(서울) 황성기독교청년회관에서7월 8일, 각계 연합회협의회를구성하여 중국민과 남경 국민당 중앙통신사 앞으로 유감의 뜻을 전하며 이것이 한민족 전체의 뜻이 아님을 설명하고, 일제 통치하에서의 한민족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중국에서는 반일원교위원회(反日援僑委員會), 만주에서는 랴오닝국민외교협회(遼寧國民 外交協會) 등이 사태 수습에 나서는 한편, 관민이 합심하여 배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반면에 일본측은 만주청년연맹의 일본인들이 자국을 방문하고 만보산 사건에 대한 순회강연을 펼치면서 중국 동북지방 침략의 분위기 조성에 광분하였다.

김이삼은 조선사건이 크게 번진 것에 고뇌하고 민족주의자로부터 거세게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일본영사는 김이삼을 사주해 사실과 다른 허위보도를 감행하여 조선 각지에서 화교학살의 참극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김이삼은 당초 지린에 온 것에 일본영사관은 환영했지만, 김이삼은 연일 지린(吉林) 각신문에 자기 비판기사를 발표했다. 14일 조선일보에 「일본의 정보에 근거해서 기사를 썼지만 오보이었다」는 사죄문장을 게재했고, 『지린일보』(吉林日報)에 게재된 김이삼이 쓴 기사는 창춘 일본영사 다시로(田代重德)의 「오인」을 기초로 해서 만보산 사건의 진상을 발표했다. 또한 일본인 기자들도 「중국인에 의한 조선인 배척」, 「학대」 등, 루머에 대한 보도를 행하고, 조선에서의 조선일보 지국장 김이삼이 기사를 날조해 대참극이 일어 났다고 보도 하였다.

일본영사 다시로·시게노리(田代重德)는 김이삼이 진상 내용과 자기 비판기사를 계속해서 내 보내자, 15일 일본영사는 영사관 순보 박창하(朴昌廈)를 김이삼이 묵고있는 지린의 동아여관으로 보내 그를 총살하고 증거인멸을 획책하였다. 김이삼이 총에 맞아 숨지자 중국경찰이 먼저 출동해 와, 범인 박창하(일본 영사관순보)을 검거하였다. 일본 영사관은 외교부 지린변사처에 박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동의하지 않았다. 변사처는 다시로(田代) 영사의 경질을 전청(電請)했다.

한편, 최준(崔埈)은 그의 저서에서 “김이삼은 만주에 망명중인 독립운동자들로부터 관동군의 앞잡이라 하여 그해 7월 15일 지린(吉林)에서 암살 당하였다”라고 적고 있지만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하지 않아 근거가 다소 희박해 보인다.

만보산 사건 허위기사로 조선내의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화교 사망자 91명, 중상자 102명이고, 중국측 발표로는 사망자 142명, 중상자 546명, 행방불명 91명, 재산피해액 4억 1,631만 207엔 및 영사관 피신자 1만 6,800명이었는데 일본인 사망자는 없었다.

이 사건의 본질은 만주에 세력을 형성한 중국 민족운동 세력과 조선인 민족운동 세력의 반일 공동전선투쟁에 대해 중국인과 조선족을 이간하여 분열시키려는 일본의 치밀한 음모였다. 이를 만주 침략과 대륙침탈의 발판으로 삼고 국제적으로는 일본 입장을 유리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결국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대륙국가 건설에 이용하였다.

 

조선일보의 허위보도는 언론이 아닌 범죄집단

만보산 사건은 일제가 모략적이며 계획적으로 조작한 만주사변의 전주곡이었다. 한·중 민족간의 갈등을 야기시켰고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으로 그 중심에는 조선일보가 서 있는 것이다.

언론은 그 시대의 사회적 요구에 의해서 만들어 지고 신문의 기능도 다르게 역할해 왔다. 오늘날 조선일보의 보도행태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던 만보산 사건은 이런 부분에서 더욱 더 언론의 힘과 그 영향력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조선일보가 많은 지식인들에게 비판받고 언론이 아니고 범죄집단 평을 듣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언론답지 않은 언론은 사회의 좀이 되고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 언론답지 못한 찌라시 허위지면이 뼈 아픈 역사를 만든다는 것을 조선일보는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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