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맞이 특집 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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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맞이 특집 좌담
  • 이천저널
  • 승인 2006.09.28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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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달속에 우리네 삶이 덩실거리네

참석자 - 허섭 이천향교 전교, 이인수 이천문화원 사무국장, 한승남 이천향교 장의, 윤희문 이천시 산업복지국장

   
▲ 왼쪽부터 윤희문 이천시 산업복지국장, 한승남 이천향교 장의, 허섭 이천향교 전교, 이인수 이천문화원 사무국장
추석을 맞아 이천의 어제와 오늘을 말한다. 불과 4~50년 사이에 시대는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다시 정보 사회로 바뀌고, 우리의 생활상은 그 변화 속에 흔들리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천 토박이로 살아온 네 분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옛날 극장에 갔었네

   
윤희문/ 올 초에 이천 극장이 없어진 건 아시나요? 이맘 때가 되면 옛날 극장 생각이 납니다.
허섭/ 극장 구경은 다른 때는 못가도 명절 때는 꼭 해야 하는 걸로 알았죠. 장호원 들어오는 버스가 그때는 시내 버스가 없고 노선 버스였죠. 안성, 여주, 청주를 지나서 가는 버스라 동네마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버스에 매달려서까지 극장 구경을 갔어요. 그러면 추석 때는 극장에서도 밤늦도록 연속 상영을 하죠. 그날은 극장에서도 인기있는 민속 영화인 춘향전, 장화홍련전 같은 걸로 특별 상영을 하지요. 복도며 출입문에도 서서 보고들 그랬어요.

윤희문/ 장호원고등학교에서 극장까지는 한 2km정도 떨어졌는데, 그때는 극장가면 정학맞고 그랬잖아요. 허 선생님은 저희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셨지요. 어쩌다 단체 관람이라도 가면 그날은 수업이 안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좁은 극장에 그 많은 인원이 들어가니 통로까지 가방을 깔고 앉고, 여름이면 땀냄새에 화장실은 갈 수도 없었지요. 그래도 그게 좋다고... 제가 본 영화중에는 <독짓는 늙은이>라는 영화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더라구요. 물론 <벤허> 같은 대작도 있었지만요.

허섭/ 장호원 극장은 처음부터 극장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고 창고처럼 쓰던 것을 극장으로 만들어 가지고 바닥에다 멍석이나 가마니를 깔고 영화를 상영했지요. 옛날 장호원 청원상회 자리 가건물에다 극장을 짓자고 해서 등받이도 없는 긴 의자 놓고 그것도 모자라 그냥 바닥에 앉아서 보았는데도 초만원이었어요. 그러다 자유당 시절에 이천 읍내와 장호원 읍내에 읍민회관을 지었는데 그 읍민회관이 자유당 정권이 약해지면서 적자가 나자 개인에게 불하를 했어요. 불하를 받은 사람이 서울에 있는 극장 못지 않은 시설을 갖추어 극장을 차렸는데 그 주인이 의정부에 또 다른 극장을 가지고 있어 관리가 어렵다며 이걸 처분하겠다고 내놓았어요. 그래 장호원 사람들의 권유도 있고 해서 제가 그걸  68년도에 1000만원에 인수를 했는데 영업이 아주 잘 됐어요. 그러다 나중에 텔레비전이 나오면서 시들해져 결국 문을 닫고 말았지만요.

이인수/ 허 선생님이 말씀하신 공민회관에 이천극장이 생기기 전에, 새람은행에서 설봉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보면 복개천 개울이 있는 지금의 3번 국도 도로변에 천막 극장이 있었어요. 극장이라곤 하지만 시설이 갖춰져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막에 가마니를 깔고 영화를 봤죠. 지금처럼 청소년 관람가 영화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데 어울려 보았는데 워낙 오래된 일이라 기억은 잘 안나지만 <검사와 여선생> 같은 변사가 해설하는 무성 영화나 문예 영화 같은 것을 본 것 같아요. 그러다 지금의 이천극장 자리에 <이공관>이라는 극장이 생겼지요. 아마 이천 공민 회관을 그렇게 불렀던 거 같아요. 지금은 번화가지만 그 당시의 극장주변은 허허 벌판이었어요. 그것이 그 무렵에 유일한 문화 공간이었죠.

이웃 마을과 섶다리도 놓고

   
한승남/ 옛날에는 장 보러 갈 때 2~30리 되는 길을 걸어다녔어요. 그리고 웬만한 마을에는 달구지를 가지고 장터에 짐을 날라주며 운임을 받고 사는 분들이 한분씩 있었지요. 그런데 이 달구지가 평평한 길을 갈 때는 상관이 없지만 개천을 건널 때는 달구지를 개울 안으로 끌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채찍질을 하고 뒤에서는 밀고 앞에서는 잡아 당기고 그렇게 해서 간신히 개울을 건넜지요. 그땐 주변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달려들어 도왔지요. 그런 풍경이 그리워요.

이인수/ 저는 어려서 지금 설봉산 설봉서원이 있는 아주 외딴 곳에 살았어요. 집이라고는 두 채밖에 없었어요. 이천초등학교에 다니는데 학생수가 많다고 해서 2학년 때 분교가 되어 뒤에 이천남초등학교가 된 천막학교로 다녔습니다. 거기가 지금의 분수대 오거리인데 기차역이 있었고, 그 앞 공터에다가 천막을 치고 공부를 했지요. 교실이 천막이다보니 한여름에 비가 오면 다리 밑으로 물이 흐르고, 근방에 늪이 하나 있었던 게 기억이 나고, 그 옆에는 전쟁 때 미처 치우지 못한 고장난 탱크가 한 대 서 있었는데 그곳이 아이들의 놀이터였죠.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되면 수여선 기차가 왔다 갔다 했는데 그 정경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참 아름다웠죠.

한승남/ 이천시내 같은 경우에도 큰 다리는 오천교, 중앙교 두개 뿐이었고, 중리천에 사람만 지나다니는 좁은 다리가 서너개 있었지요. 창전동과 중리동 사이로 이어져 맑은 물이 내려가고 양쪽에는 버드나무가 늘어져 멋있었어요. 72년도 장마 때만 해도 장마만 지나고 나면 거기서 물고기를 잡고 놀곤 했지요.
이맘때면 마을과 마을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를 놓곤 했지요. 집집마다 다릿발을 가져오고 섶을 해다 다리를 놓았지요. 양쪽 마을에서 반반씩 만들어 오는데 이때 만든 다리를 이듬해 장마 전까지는 이용하지요. 그러다 장마에 떠내려가면 여름은 그냥 바짓단을 걷고 건너다니지요. 여름에야 춥지 않으니 그냥 건너도 되니까요.
장마에 다리가 떠내려가면 또 다시 추석이 오기 전에 만들고, 그렇게 해서 살았지요.

햅쌀 송편에 순대국

윤희문/ 이맘때가 되면 추수를 위해 논에 물을 뺍니다. 그러다보면 논 가장자리 웅덩이와 또랑에 붕어, 미꾸리, 꾸구리, 송사리 같은 것이 잔뜩 모여들지요. 추석 때가 되면 식구들끼리 논 웅덩이 물을 퍼내고 물고기를 잡아 밭에 있는 토실토실 익어가는 무랑 배추를 넣고 찌개를 보글보글 끓이면 그 맛이 정말 꿀맛이지요. 그 맛을 아는 사람은 송편 안 먹었어요. 거기다 막걸리나 소주 한잔 곁들이면... 또 명절때가 되면 마을에서 돼지를 잡았어요. 부잣집들은 돼지 다리 한짝씩 사가고, 그 나머지로 순대국을 끓입니다. 순대국은 공짜거든요. 선지하고 시래기, 찹쌀 같은 것을 잔뜩 넣어가지고 만들죠. 그럼 동네 사람들 잔치하는거예요. 가마솥에다 장작불로 끓인 그 순대국 맛이 얼마나 좋은지 정말 일품이었죠. 지금도 그 맛이 그리워요. 

   
허섭/ 장호원은 더러 햅쌀이 나와 햅쌀로 송편을 만들었지요. 일본사람들이 개발한 은방주라는 벼가 올벼인데 그걸로 송편도 빚고 술도 만들었죠. 그리고 추석에는 증편을 만들었는데 흔히 찐떡이라고 하지요. 증편은 쌀가루를 술에다 삭히면 빵처럼 하얀 떡이 되는데 그 위에다 대추, 맨드라미, 석이버섯 등의 고명을 얹어 떡을 만들어 제삿상에 올렸지요. 찹쌀가루로 전을 부쳐 콩으로 고물을 만들어 싼 음식도 있었구요. 이른 추석에는 대추도 울긋불긋한 대추를 놓고 제사를 지냈어요.

한승남/ 이천만의 먹거리로는 게걸무를 빼놓을 수 없죠. 게걸무는 작별리 고개만 넘어가도 안되고, 넋고개만 넘어가도 안된다고들 합니다. 그만큼 지리적 조건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얘기겠지요. 게걸무는 봄에 일찍 심어서 장마전에 게걸무 씨를 받아요. 그걸 다시 한달 후에 심으면 가을 게걸무가 되지요. 지금의 열무랑은 비교가 안되죠. 무가 아주 딴딴해서 가을에 수확하면 소금에 절여다가 이듬해 여름에 밑반찬으로 먹지요. 소화가 안될 때 게걸무 절인 물을 먹으면 체증이 내려가곤 했지요. 그러니까 게걸무 국물은 이천에서 소화제를 대신하는 민간요법이었지요.

이인수/ 이천에 대표적인 한식당으로는 청일옥을 들 수 있지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설렁탕이나 곰탕을 파는 이문옥이라는 식당도 시장통에 있었구요.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중국식당으로는 중화원, 일미원, 보승루 같은 곳이 있었는데, 그때 중국집의 짜장면 한그릇이면 최고의 성찬이었죠.

허섭/ 그 당시에는 장호원에도 장국밥 하는 곳이 많았어요. 장호원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지주들이 많이 살았어요. 장호원이 경기미의 집산지이고, 상업의 중심지니깐 시장도 크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크고 작은 식당들도 많았지요. 대중 식당은 장국밥집이고, 요정도 있었어요. 대흥관, 해동관, 장흥관 등이 4~5개가 됐는데 요리도 하고 기생들도 있었습니다. 대중 음식으로는 설렁탕들을 즐겼는데 신성옥이 유명했습니다. 장호원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충주에서 넘어오면서 일부러 버스 시간을 맞춰 들르시는 분들이 있을 정도였지요.
그 넓었던 운동장은 왜 그리 좁은지

한승남/ 지금은 음식이 흔하고 하니깐 상관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음식을 귀하고 중하게 여겨 운동회를 추석 전에 하는 일은 없었어요. 제사 지낸 음식, 송편, 과일 따위를 가지고 운동회를 하는 거지요. 삶은 밤조차도 귀했어요. 학생이 한 명 있는 집은 드물고 대개 두세 명씩 있으니까 온 식구들이 다 가는거예요. 가을 운동회는 시골의 잔치죠.

이인수/ 운동회는 시내 전체의 축제였어요. 이어 달리기, 박 터뜨리기, 줄다리기 같은 것을 했던 기억이 나요. 학생들 경기 말고도 주민들이 경기에 많이 참여했지요. 운동회 무렵에는 늦게 남아 연습을 하니까 배가 쉬 고파요. 밀 보리 따위를 훑어 가지고 손바닥으로 비벼 먹고 그랬어요. 그 주변이 논보다는 밭이 많아 밀이나 보리를 많이 심었어요.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목화도 많이 심었고요.

윤희문/ 저희는 고구마를 많이 먹었어요. 고구마를 많이 심었거든요. 고구마를 삶아서 가져가면 중간에 다 먹으니깐 날 고구마를 몇 개씩 가방에 담아가지고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이인수/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지금의 은혜웨딩홀 자리에 당시의 양조장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막걸리를 파는 곳이었고, 설봉호수 위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월광소주라고 이천의 고유 브랜드가 있었는데 증류식 소주로 엄청 독했어요. 서민들이 먹는거라 비싸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그때는 포장 단위가 한 되였어요.

윤희문/ 요즘에는 학교에 학생들이 많지 않지만, 저는 대서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지금 현재 88명 정도라는데 예전에는 450명 정도로 큰 학교였죠. 운동장은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은데 학생이 450명에 주민이 한 1,000명정도 모였는데도 그 운동장이 그렇게 커 보였어요. 대운동회를 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한달 정도 연습을 하는데 탑쌓기가 아주 인상에 남아요. 요즘으로 말하면 기계체조 같은 건데 높이 탑을 쌓다가 “야!" 하는 구호에 일시에 다 무너지던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지나고 나니 참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허섭/ 다른 얘기지만 6,70년대만 하더라도 추석빔, 설빔, 단오빔이 있어서 일년에 세 번은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새옷을 입는 풍습이 있었어요. 물론 가난한 사람들은 헌옷을 빨아 입는 일도 있었지만 새옷을 입히는 풍습이 있었죠. 아이들이 많은 집에는 8월달에 접어들면서는 새우잠을 자면서 옷을 지었죠. 그 당시에는 옷도 색을 맞춰서 형형색색으로 입었어요. 추석이 임박하면 다림질을 하는데 새벽에 안개랑 이슬을 맞히려고 빨래줄에 널어 놓은 것이 만국기를 보는 듯 화려했어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걸 보고 “저 집은 아이들이 6형제인가봐. 남자 아이 옷이 6개가 걸렸네” 라고 알 정도였죠.

신파극에서 콩쿨대회로

한승남/ 그때는 라디오도 없었고 들을거리, 볼거리가 없었으니 추석 때면 신파극을 많이 준비했어요. 연령층 별로 배역을 맡아 공연을 했지요. 내용은 주로 장화홍련전, 심청전, 흥부놀부 같은 권선징악이나 효가 주를 이루었지요. 동네뿐만 아니라 이웃에서도 놀러올 수 있도록 마을마다 날짜를 겹치지 않게 달리했지요. 분장들을 하고 동네를 돌면 마을 분들이 들춰보며 장난을 걸고 아주 큰 축제였지요. 그러다 스피커가 나오면서 문화가 콩쿨 대회로 바뀌었지요.

윤희문/ 저도 봤어요. 아주 어렸을 때 멍석 깔아 놓고 신파를 했지요. 지금을 말하면 연극인데 한집에 아이들이 4~5명은 되잖아요 그러니까 마을 인구가 한 400명 정도는 되거든요. 다 모여서 킬킬거리며 웃고 추석되면 마을마다 콩쿨대회하고 지금의 노래 자랑이죠. 판이 좀 커지면 여러 동네가 연합해서 큰 상품도 걸고 참석 대상이 마을이 아니라 그 지역 전체로 커지면 읍민 체육 대회가 되고 그랬어요. 지금도 넓은 들판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지금 빠른 속도로 도시화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요.

좀 다른 얘기를 할까요. 장호원에서는 데이트 장소로 제방뚝이 으뜸이었죠. 지금 무렵이면 코스모스가 한창 예쁘게 폈어요. 한 선생님은 어디서 데이트를 하셨나요?  

한승남/ 저는 호법에 사는 촌사람이니깐 멀어서 힘들었지만 군청에서 숙직하다가 많이 봤죠. 그 무렵에는 공설운동장이 이천의 데이트 장소였던 것 같아요. 공설운동장이 생긴지는 60년대 중반쯤인데 지금은 시멘트지만 그때는 잔디밭이었어요. 또 지금은 가로등 조명이 밝지만 그때는 불도 없었지요. 공설 운동장이 인가도 멀고 계단에 앉으면 조용하고 컴컴해서 은밀한 장소로 적격이었던 모양이에요. 안흥지에서는 연인들이 뱃놀이도 하고 그랬어요. 연꽃도 수려했구요. 나중에는 설봉호수가 생겨서 그리 옮겨갔죠.

윤희문/ 장호원은 지금도 4일, 9일에 장이지만 추석때가 되면 대목 장이 열리는데 장호원은 장이 상당히 컸어요. 씨름 대회도 정기적으로 해서 씨름 선수도 꽤 많았지요. 서커스도 보고...

이웃에 떡도 돌리고

허섭/ 이 무렵이면 마을마다 거북놀이를 많이 했죠. 수수 잎파리를 따고 거북머리는 새끼로 꽈서 만들고 그것을 뒤집어 쓰고 커다란 그릇을 가지고 다니면서 “거북이 왔소, 거북이 왔소”하면 제사 지내고 남은 송편이랑 음식을 나누어 주고 그랬죠.

윤희문/ 시골에서 저도 했어요. 집집마다 다니면서 송편도 얻어 먹고, 그땐 마을마다 다 했잖아요.

허섭/ 그런데 그 사람네들도 동네에 떡 못한 집이 있으면 찾아서 나누어주고 그랬어요. 그 무렵엔 부자들도 자기 집 근처에서 떡 못해 먹는 집이 있으면 남몰래 쌀 한 말이라도 나누어주곤 했지요.

   
이인수/ 이천의 역사는 오래됐지요. 그것을 뒷바침하고 있는 것이 설봉산성하고 설성산성인데 단국대 발굴 조사단이 발굴을 해 보니깐 4세기 후반경에 백제가 쌓은 산성이라고 해요. 역사학자들은 한성 백제 시대에 돌로 된 산성이 없었다고 하는데 설봉산성을 조사하다 보니 밑에서 돌로 쌓은 부분이 나왔어요. 백제가 견고한 돌성을 쌓아 방어를 할 만큼 이천이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것이지요. 또 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해서 단절됐던 송 나라와의 외교를 회복시켰던 서희 선생이 바로 이천 분이 아니십니까. 그 분의 정신이 우리 이천의 정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윤희문/ 이천시의 미래는 밝습니다. 왜냐면 타지역에 비해 안 가지고 있는 게 없어요. 우선 교통이 편리하고, 더욱이 전철이 들어오지 않습니까. 다만 법적 규제로 어려움이 있지만, 현재 가지고 있는 것만 해도 쌀에다 도자기, 또 복숭아도 농촌 경제에 큰 도움이 되고 있지요. 또 기업으로는 하이닉스가 세계적인 기업 아닙니까? 진로도 세계적인 술이고요. 돼지고기도 도드람 포크, 하이포크가 시장에서는 최고로 치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지리적 여건과 지역적 특성을 잘 이용한다면 충분히 성공한 도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방 자치가 되면서 경쟁이 심화됐잖아요. 우리 시장님 같은 경우는 개발 전문가니깐 2010년도 전철 개통을 대비해 역세권 개발이라든가 건축에서 계획 개발이 될 수 있도록 잘 만들어나갈 겁니다. 장호원도 지금은 인구가 줄고 있지만 곧 소도읍 육성 사업이 원할하게 이루어지고 공단 개발 사업이 확정되면 크게 달라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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