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새벽별의 포효
icon 노동꾼
icon 2010-05-25 20:00:29  |   icon 조회: 9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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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두 시가 되어서 집을 나섰다.

이삼십 장 남짓한 얇은 수첩에 모나미 볼펜과
한 번 잘못 쓰면 쪽박을 찬다는 시험용이자 실내 경마장에서 주은 컴퓨터용 샤이펜,
이렇게 창 두 자루와 방패를 챙겨서.

충무로역에서 바꿔탄 삼 호선, 오늘은 다르다.
은평 뉴타운 공사 현장 갈 때도, 홍제동 노가다 뛰러갈 때도,
대화역에서 내려 중앙병원인가 공사 현장 갈 때와도 다르다. 무언가가 안개처럼 몰려온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거북선도, 남해 바다도 아닌 무언가가... 또 다른 무언가가...

경복궁, 독립문, 무악제, 홍제, 녹번, 다음이 불광인가?
졸립다. 구파발을 지나면 지상으로 달리겠지.
창을 세워 방패에 새긴다. 지금 가는 이 길 위에 남겨질 뒷사람의 이정표.
구파발에서 지상, 그리고 예기치 못한 지하, 원당이 지상이라는 건 생각나는 데...
세월은, 산야를 삼키고 엉겨붙는 콘크리트처럼 기억을 두껍게 덮었다.

십 년, 그때 행주대교를 건너 일산으로 가면서
야방으로 팔려가면서,
몇 개월 밤을 새웠던 정발산역 근처,
그 역에서 내려 기억을 더듬어볼까 하다가 대화역까지 곧장 간다.

그때도 이 에스컬레이트가 있었지, 아마?
지상에 올랐을 때 낯설다. 그래도 이십 층, 사십 층, 육십 여층 빌딩을 공사해본 덕분에,
종로나 광화문에 자주 나가는 덕분에 촌놈의 두리번거림은 아니지만
야방을 서는 몇 개월 중 가끔 이곳을 와봤었다는 게 오히려 더 낯선 풍경으로 놓였다.
전방 500M 킨텍스, 제대로 나왔다.
얄궃게 치장한 애들이 많이 보인다. '유시민 행사에 온 지지자?'
길 양쪽 인도는 연습장을 판다. '아직도 연습장을 쓰는가?'
표지가 모두 일본풍이다. 잘은 몰라도 일본 만화에서 따온 것들인 것같다.
인형이나 장난감, 그리고 목검과 날을 세우지 않는 진검,
이 거리는 일본을 옮겨놓은 것인가?
그리고 보니 아이들 치장도 그런 것 같다.

서점 외국책 코너에 가면 일본책은 확 다르다.
미국이나 유럽, 또는 우리나라 책표지는 비슷하다.
매끄러운 사진, 그림도 매그럽다.
그러나 일본은 로이 리히텐스타인 그림 같다.
킨텍스에 들어서니 " 카니발..."이란 글이 눈에 뜬다.
'아, 아이들은 카니발 축제에 왔구나.'
그러나 약간은 서글퍼진다. 일본 귀신, 서양 귀신들이.
세계화 시대에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서 서글픔을 느끼고
민족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내 자신이 어쩌면 초라하고 서글픔 존재일지도.

나는 이미 정신적 퇴화적 겪고 있다.
최첨단을 걷고 있다고, 야비하게 살아오지 않는 내 얼굴이 아름답다고 했지만.
어느 날 멱을 감기 위해 샤워실에서 바라본 내 옆모습,
호모 엑렉투스다.
허리가 굽고, 아래배가 좀 튀어나왔고, 어깨가 앞으로 수그러져서 걷는 털만 없는 호모 엑렉투스.
진화의 과정은 또래와 비슷했을지라도
노가다에 술에 세상사에 치이다보니 퇴화는 먼저 이루어진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지혜롭고 지혜로웠던 인간에서
그저 고만한 지혜로운 호모 사피엔스에서
불을 사용하고 직립인인 호모 에렉투스로까지 퇴화했다.
기억의 뇌용량은 콘크리트로 양생중이고
여기서 더 퇴화하면 라이터가 있었도,
성냥이 있어도 켤 줄 모르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불을 사용할 줄 몰라 따뜻한 땅을 찾아 아프리카로 가야 한다.
산장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어야 한다.
직립의 서글픔을 알아차린 만물의 영장 인간이 아닌
네 발로 초원을 대지의 심장을 박차고 달리는 표범처럼.

열린 우리당 대의원 대회 현수막이 보인다.
합당 반대.
그 아래서 권총을 주웠다.
총구와 총신은 부러져 나가고 총미 부분도 부러져 나갔다.
방아쇠를 당기니 드르륵 소리가 난다. 레이저도 나간다.
바닥에 향하여 쏘니 레이저 불빛이 재미있다. 오늘 하루 심심하지 않겠구나.
총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전경들 앞으로도, 당원들 앞으로도
바닥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방아쇠를 당기며.
총을 오른손에서 왼손,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공중에 던졌다가 받아서 방아쇠를 당긴다.
몇 번하니 뭐가 된다. 홍콩영화 주윤발이처럼 된다.
총을 공중에 던지고 바닥에서 폼나게 옆구르기를 해서 총을 받아 쏴보고 싶은 마음은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걸로 대신했다.

여기저기서 실랑이가 벌어진다.
합당파와 반대파간에, 반대파에 전경들 간에, 들어가려는 자와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 간에.
나와는 무관하지만 이럴 때는 괜시리 우울해져서 멜랑콜레, 멜랑꼴레,
국민 한사람의 분량, 아니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의 몫만큼 착찹하고.
그러나 내 속 주머니에는 방패와 두 자루 창이 있고
내 손에는 여차하면 레이저가 발사되는 권총이 있기에 금뺏지도 돌아갔을 법한 곳을
마음껏 두리번거리며 오락가락 어슬렁거리기도 여유롭게 활보하기도 한다.
드르륵 드르륵 레이저를 바닥에 쏘면서.

밖으로 나와서 킨텍스 건물을 한 바퀴 돈다.
남문 쪽, 길 건너는 공사장인 모양이다. 울타리로 막혔다.
여기는 도심의 끝이고 개발이 시작되는 처음이라 그런지 야생종 풀들이 자란다.
드르륵 드르륵 오늘은 심심하지 않다.
귀신이 된 아이들과, 기사가 된 아이들, 그 아이들을 모델삼아 사진을 찍는 아이들,
모양을 낸 정원에 심지 않고 자란 야생종 풀과 세한도 옮겨 심어놓은 쭉쭉뻗은 소나무.
드르륵 드르륵

안으로 들어간다.
안내석에는 안내인이 없지만 볼 건은 보고 간다.
이 일대 관광지를 소개한 손바닥만한 광고지도 한 장씩 다 뽑아서 읽는다.
가슴 한켠에 일말의 걱정도 든다. 벌써 네 시 반이 다 되어가는 데
유시민을 알리는 현수막도 지지자를 모우는구호도 없다.
'백 명도, 그것도 나처럼 바람 쇨 겸 왔다가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니 돌아간 게 아닐까?'
이 층에 오르니 시민광장에서 본 글을 가슴에 단 사람이 보인다.
이층에는 또 결혼과 돌잔치가 열리는 곳도 있다.
고래사냥을 한 번 나서볼까^^(고래사냥을 했던 한 때의 기록은 혼자 피식피식 더 웃다가^^)
드르륵 드르륵

삼층에 가니 드디어 보인다.
오천원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출입구를 막아서고 뺏나 싶어
만원짜리 다 빼앗길까봐 아이스크림 먹고 잔돈을 바꾸어두었는 데
들어서는 데도 돈 달라는 손 내미는 자 없다. 아무도 없다.
'아마 내 손에 있는 권총이 겁나서겠지.'
드르륵 드르륵.
생각보다 적게 오고, 생각보다 많이 왔다.
언론보다가 대체로 맞는 것 같다. 이천오백 명에서 삼천 명.
천팔백 석이라는 그 좌석을 다 채우고 서있는 사람이 몇 백 명이 되었으니까.
생각보다 적게 온 것은 입추에 여지없이 메워터지지 않았고
생각보다 많이 온 것은 휑하니 찬바람에 옷깃을 여밀 우려는, 우려로 그쳤다.

"두드락" 공연이 끝날무렵
자리를 잡았다. 명당을 찾는 지관인지라 양지바른 곳에 잘 잡았다.
한명숙 전총리, 이해찬 전총리, 신기남 의원, 정세균 의원, 장영달 의원
축사를 한다. 유시민 의원도 그랬지만,
웃고 있지만 대의원대회 때문이라고 했듯이 그리 밝고 낭낭한 목소리가 아니다.
모두가 유시민 의원과 인연, 이것은
새해 첫날 고향에 가지 못한 어느 슬픔 밥 신도 아저씨가
조계사에서 법문을 듣고 새문안 교회에서 설교를 들었을 때
누가 누구를 커닝했는지 모를 정도로 비슷한
유시민 의원과의 인연을 이야기하고.
열정을 바쳤던 열우당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네티즌 질문자가 나서고
탱화처럼 걸린 신영복 선생님 글씨,
지금이 바로 나의 창을 뽑을 때, 방패에 몇 자를 새기고.
드디어 싸가지 없다는 백바지,
정당 파괴범,
싸가지 밥 말아먹는 그 인간
유시민 의원이 나오신다.
첫 대면이다.

티비나 동영상에서 본 모습과 똑같다.
지지자나 국민들에게는 진솔되고, 겸손하고, 봉사하고, 싸가지 있고
권력과의 유착을 통해 한몫 챙기려는 사람들 앞에서는
역사의 빈 그릇을 던져줄 것 같은 그 모습, 그 어투.

드르륵 드르륵
아저씨 약주 한 잔 하지 않았어도
열라 소리를 질렀다. 괴성을 질렀다.
야~~~! 와~~~! 아자 ! 으자! 우윽! 으아아아악! 웩! 쿠당! 파박! 앗싸! 으덜덜덜덜! 끼야호!
....
팔도 힘차게 뻗고, 박수도 세차게 치고, 몸도 써가면서
스트레스 팍 풀었다.

나와서 걸었다.
남문쪽으로 나와서 걸었다.
호수공원 쪽으로 걸었다.
육교를 건너고, 호수공원은 보이지 않는다.
밤이 온다.
드르륵 드르륵
이제는 총도 버려야 한다.
초원에서 밤을 이겨내는 아프리카 전사처럼
방패와 창이 하이에나 떼로부터 나를 보호하리라.

건기의 황무지를 건너 호수에 목축이고
다시 킬리만자로를 향하는
새벽별의 포효처럼.

기호 8번 유시민,

유시민 화이팅!!!
2010-05-25 20: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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